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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16. 02:04

개강과 더불어 찾아온 긴 추석 연휴 때문에 이번 주가 진짜 개강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한 학교는 이번 주가 대동제란다. 헐~)


지방대 학생들이라고 적당한 수준에서 방치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는 게 평소 신념이다. 하지만 수강생들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을 수도 없어서 계속 고민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 학기 들어서면서 느낀 것은 내가 점차 학생들의 비위를 맞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덕분에 '신념'과 '현실'의 경계가 아주 모호해졌다.

2014. 6. 30. 18:33

작년 2학기부터 강의평가 점수가 널을 뛰고 있다. 작년 2학기에는 같은 과목을 두 개 반 맡았는데 한 반에서는 83점(5점 만점에 4.15점가량), 다른 반에서는 68점(3.4점)을 받았다. 그리고 올해는 두 학교에서 세 과목을 맡았는데 한 학교의 두 과목은 항목별로 평가는 나오는데 점수가 산출되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작년에 받은 평가에 근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한 과목의 결과로 대략 멘붕상태이다. 한 사람이 아직 평가에 참여하지 않지만, 대세에 지장이 없다는 상황에 65점(3.25점가량) 정도이다. (3.6점 이하의 강의평가를 받으면 잘린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과목은 수업 참여인원도 12명에 지나지 않는데 평소 달리지 않던 주관평가에 5명의 적극적인 참여도 보였다. 좋은 평가를 제외하고 요약하자면 '수업자료를 미리 배포하지 않아 수업을 듣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기말고사를 준비하는 자료를 너무 늦게 나눠줬다.' , '이 수업에 대해 그닥 얻어가는 것이 없어 너무 후회가 된다.' , '(기말고사 자료를 나눠주는 무렵이었던가 농담으로 난독증이란 표현을 쓴 적이 있는 거 같은데) 난독증이란 표현을 쓰기 보다는 모르는 것이 있으면 가르쳐 주는 사람이 스승 아니던가요.'이다.


학교에는 여러 가지 선생의 모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원칙을 준수하는 선생, 욕은 좀 먹더라도 다그치는 선생, 자율적인 선생 등등... 내가 강의를 하는 중국어과는 아무래도 어문학 위주의 수업이 대다수이고, 학생들도 특히 중국어 이외에는 커다란 관심이 없는 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의 학습의욕을 고취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 생각에 따라 여러 방안을 수업에 적용하고 실험하는 중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런 과정들이 아무래도 학생들에게 낙제점을 받은 모양새다. 



평소에 제아무리 자율적인 수업을 해도 기말고사 한 번 어렵게 내면 학점을 보기 전 평가를 하는 강의평가에서 제대로 된 점수를 얻기란 힘들다는 점을 고려한다 해도 속상함은 어쩔 수 없다. 내 강의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인가, 교재를 하나 준비해서 그걸 토대로 해야 하는가, PPT를 작성해서 서비스해야 하는가, 평소 수업시간에 딴 짓하는 학생들을 좀 엄하게 대해 수업의 기율을 세워야 하는가, 주간보다 수업의 질이 낮을 수밖에 없는 야간 학생들에게는 요구치를 좀 더 낮춰야 하는 것 아닌가 등 복잡한 생각이 꼬리를 물기 마련이다. 


강의평가가 전부는 아니겠지만, 또 항목에도 문제가 많은 편이지만 반영하지 않을 수도 없다는 것이 평소의 견해이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평가내용을 반영하겠다는 문자를 보냈다. 혹독한 강의평가를 하고 아마 본인들의 예상보다 좋은 학점을 받아서인지 답이 거의 없다. (참고로 이 과목은 15명 이하 과목이라 절대평가였고, 그 반이 처한 여러 환경을 참작하여 실제로 나온 점수보다 몇 단계씩 더 높은 점수를 줬다.) 



강의하는 거 참 어렵다. 그 전에 잘릴지도 모르겠지만...

2013. 10. 22. 14:14

올해 72세의 어머니가 길을 걷다 잎이 빨갛게 물든 이름모를 나무를 보고 "아휴... 예쁘다."라며 연신 감탄사를 날리신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조만간 이모들이랑 놀러가는데 입을만한 점퍼가 없다고 툴툴 불평을 늘어놓는다. 이 소리를 듣고 내가 "점퍼 사줄까?"라고 말했다. 이내 어머니 얼굴에 화색이 돈다. 엄마가 엄마가 아니라 한 여자임을 깨닫는 요즘이다. 노총각이 나쁘지 않은 건 이럴 때가 아닌가 싶다.

2013. 8. 15. 00:03

이제 페북에서 다시 블로그로 옮겨오기로 했다. 페북을 아예 하지 않을 것 같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 이유에서 최대한 자제하려고 한다.  


내게는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 말고 일반 사회생활을 하는 비슷한 연령대의 친구들과 후배들이 더 많은데, 그네들과의 교류에 있어서 한 가지 고민을 깊게 다루고 있는 중이다. 아까 전화로 친한 후배와 장시간 통화하다가 후배가 자신의 교육관을 피력한 바 있었는데, 거기에서 딱 그쳤으면 좋았을텐데 끊고 나서 무슨 마음에선가 카톡으로 내 관점의 이야기를 조금 했다. 그러다가 교육관에 관한 논점이 갑자기 정보의 독점 쪽으로 새는 바람에 이야기가 잘 되지 않았다. 문자로 주고받은 거라 후배가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형은 형이 생각하는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겠다는 느낌을 살짝 받았다. 


내가 고민스러운 부분은 딱 이 지점이다. 요즘은 유사한 분야를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할 때는 큰 어려움이 없는데, 다른 사회생활을 하는 친구들과 대화를 할 때는 뭔가 핀트가 안 맞는다는 느낌이다. 그게 아마도 내 대화의 방식이 무언가 가르치려는 느낌을 줄 수도 있겠고, 또 대화와 토론에 있어서 훈련을 받지 않은 경우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내 방식을 강요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그러면 그런 그룹의 친구들과 나는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가란 고민이 자연스레 생길 수 밖에 없다. 내 처음 의도는 절대 누군가를 가르치려는 마음도 없지만, 자꾸 그런 방식으로 가게 된다는 것은 위험하다. 그건 상대방만 탓할 수도 없고, 나에게도 문제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부하는 사람으로서의 특성상 직업적으로 끝까지 물고 늘어져 토론하고 관점의 차이를 명확히 하는 것은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해야 하는 이야기인데, 나는 자꾸 이것을 혼동하는 것 같다. 나한테는 이미 일상이 된 일들이라 말할 때 아무런 느낌을 갖지 못하고는 했다. 그리고 그런 것을 느꼈을 때 스스로 주의하자는 다짐도 한 지 꽤 오래 됐다. 


그런데 불쑥불쑥 이런 문제들이 튀어 나온다. 해결방법은 단순하다. 그저 오랜 세월 속에서 오는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는 내 직업적 대화방식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얘기를 잠자코 들어주는 방식이 가장 최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네들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져온 생각과 고정관념이란 것이 있다. 때문에 내가 관점의 차이라는 것을 명확히 그들에게 설명하지 않거나 그들이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을 때 '오해'라는 것이 생기고 '불화'가 발생하게 되는 것 같다. 


최근까지는 왜 그들은 나의 순수한 의도를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것일까에만 열중했는데, 이제는 그게 아니라 내가 어떻게 그들의 말을 들어주며 내 견해를 인내해야 하는가에 열중해야 될 때가 아닌가 싶다. 


어렵다. 그래도 최대한 하고 싶은 말을 줄이는 것이 오랜 벗들을 잃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다. 내 입을 꼬매 보자!        

2013. 6. 25. 07:14

나이가 들면 자신만의 세계가 더욱 짙어짐으로써
세상에 대해, 사람에 대해 이제 꽤 많은 것을 알고 있노라 
자부하게 된다. 이것은
모두 각자의 경험치에 근거하게 되는데...

나 역시 대외적인 레토릭에서는 이런 경향을 따르는
경로의존성을 보이고 있지만
솔직히 더 불확실해지는 것 같다.
입으로는 확실하다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불확실함의 다른 표현인 경우가 더 많다.

사물의 이치나 세상 일 돌아가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사람에 대해서는 더욱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상대방에 대해 
"당신은 이러이러한 것 같아."
혹은 명확하게 규정을 하는 것을 볼 때마다
난 참 경이로움을 느낀다.

그것은 절반은 부러움이기도 하고,
절반은 의아함이기도 하다.

어찌 저렇게 상대방에 대해 파악을 잘 하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누군가 '그 친구는 어때'라고 물었을 때 
난 바로 뭐라고 답하지 못하고 얼버무릴 때가 더 많았다.

가까이 두고 십 수년을 지켜본 사람이라 해도
난 그 사람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못한다.
대체로 뭉뚱그려 표현하는 편이다.
"괜찮은 거 같아. 착한 거 같아. 나쁜 사람은 아닌 거 같아."
등등의 모호한 표현들.
이는 관찰력의 부재인지,
아니면 표현력의 천박함인지 난 도대체 알 수 없다.

세상 일에는 점차 투명해진다는 확신이 어느 정도 들지만
역으로 사람에 대한 판단은 불투명성만이 오도카니 자리하게 된다. 

이것은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작년에 이 맘때 어디선가 썼던 글인데, 저장해 둔다.

2013. 5. 20. 23:37

잠깐 양과 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우리가 밥을 먹을 때 양이 먼저냐, 질이 더 먼저냐의 차이를 따질 때가 있다. 쉽게 말하면 양으로써 포만감을 주느냐, 아니면 질로써 정신적 만족감을 주느냐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양을 추구하다 보면 질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고 또 고른 영양섭취를 놓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질과 양을 고루 겸비한 식단이 강조되는 경우가 보편적인 시각이 아닐는지.


이런 질과 양의 경쟁은 학계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전반에서도 이야기 될 수 있다. 최근 교수사회의 성과급문제(특히 국립대)와 관련된 논의는 한 가지 대표적인 사례이다. 실적을 계량화하여 성과급을 지급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가에서 그 논란은 시작한다.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견해는 이런 제도를 실시했을 경우 질 좋은 연구가 나올 수 없다는 점에서 그 근거를 찾는다.


이밖에도 사회 제영역에는 온갖 성과주의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도대체 무엇으로 평가하고, 보상할 것인가의 문제는 도처에서 제기된다. 각기 판단의 준거가 달라 접점을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성과주의를 반대하는 대다수 사람들조차 성과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내가 몸담고자 하는 학계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던 성과급 문제에서부터 연구실적의 계량화는 성과주의를 대표한다. 물론 예외는 있다. SCI나 SSCI급 논문 한 편은 묻고 따질 필요도 없이 다른 국문으로 된 논문 10편 보다 높게 쳐주는 경향이 그러한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SCI급 논문의 1편의 질이 국문 논문 10편보다 높다는 근거는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오늘 이 문제는 논외로 한다.) 연구실적은 그 사람의 학문적 역량을 평가하는 가장 첫 걸음이자 기본 평가에 들어간다. 물론 적절한 연구실적은 역량평가에 있어서 필요한 부분이다. 다만 현 단계에서 질 낮은 연구 성과들을 어떻게 걸러낼 것인가 하는 점이다.


물론 변변한 연구실적도 없는 내가 할 소리는 아니다. 하지만 '묻지 마 성과'가 가져올 수 있는 나쁜 후과에 대해서는 가끔 걱정이 된다. 우리끼리야 내공은 내공으로 알아본다지만, 많은 사람들이 쉽게 그 외양에 속아 넘어가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저녁 먹은 것이 꺼지지 않아 쓴 잡글이다.      

2013. 5. 3. 06:36

이제 반팔 면티를 입고도 새벽바람이 그리 차지 않다.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존재일까. 기숙사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며 새벽하늘을 바라보다 이런 생각에 미쳤다. 자신있게 답할 수 없었다. 나는 쓸데없이 무겁고 진지했다. 이 무겁고 진지함을 버릴 필요까지는 없다 하더라도, 이것이 어쩌면 다른 사람을 웃게 만드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닐까란 생각은 지울 수 없다. 사실 이렇게 살게 된 것도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이기도 했는데. 나는 나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들에게 차츰 어렵고 다가서기 힘든 존재가 되어갔고, 계속 그렇게 변화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내 개인적인 문제에 국한된다고 단정짓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남들보다 많이 늦게 유학을 오게 되었다는 것과 교류다운 교류가 그다지 없는 한국유학생사회의 특유의 분위기도 한몫했을 것이다. 특별히 애쓰지 않아도 타인에게 웃음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럽다.

 

'마음은 바람보다 쉽게 흐른다'고 했던가. 내 마음도 그렇고 봄바람도 그러하다.      

2013. 3. 30. 05:13

"바람에 불려 대기가 젖는다. 내가 봄비라고 이름짓는다. 봄비, 그러나 감자밭을 적시기엔 아직 적다."

 

황석영의 소설 '오래된 정원'에서 윤희가 현우에게 무엇을 하고 살고 싶냐고 하는 질문에 시를 지으며 살고 싶다면서 대답한 대목. 아직 육체는 온전히 반응하고 있지 않지만, 마음은 이미 봄과 통했음을 느낀다. 감기도 봄으로 가기 위한 하나의 길목이다.

 

부록: 영화 '오래된 정원' 엔딩씬 가운데 현우(지진희 분)와 딸 은결(이은성 분)의 엔딩 대사 中.

 

현우: "은결인 엄마를 좋아했니?"
은결: "음. 어려선 미운 적도 많았는데 커선 좋아하게 됐어요.
돌아가실 땐 무지 슬퍼서 또 무지 미웠구요.
지금은 그냥 그리워요."
현우: "좋아했단 거구나."
은결: "엄마는 외톨이에 외골수에 고집쟁이였어요."
현우: "그건 니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어."
"외톨이에 외골수에..."
은결: "고집쟁이요."
현우: "그래, 고집쟁이."
은결: "실은 저도 그래요."
현우: "그렇겠지."
은결: "우리집 식구 피가 다 그렇구나."
"근데 그게 뭐 그렇게 나쁜 건 아니잖아요."
현우: "아니지."

2013. 3. 13. 20:34

오랜만에 초보실력의 기타를 잡았다. 비록 날씨는 못내 마음에 안들 정도로 구리지만 즐거웠다. 즐거움은 누가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가식사진 흔들려서 포텐 터지지 않는구먼.

2012. 12. 8. 03:10




사랑은 가끔 완전한 거짓이 아닐까란 생각을 해본다

상대방의 사소한 몇 가지 장점을 보고 나머지 모든 단점을 초월한다 

그런 점에서는 맹목적 믿음이기도 하다

어찌보면 한낱 신기루에 불과할지도 모를 愛을 위해

홀로 고독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지독한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반면 한 두 가지 쉽게 발견되는 단점을 가지고도 우리는 상대방을 미워한다

그토록 쉽게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진정한 사랑을 찾아 외로운 거리를 헤매는 것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형이상학적으로, 

때로는 형이학적인 잣대로도 도저히 독해되지 않는다

우리는 왜 이토록 짧은 사랑을 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그토록 오랜 시간동안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답은 언제나 '머리'가 아닌 '가슴'에 있다는 걸 자꾸 잊어서이다



 

 

2012. 11. 25. 21:40

11월이 가고, 연말이 저기 어디쯤 서있는 것 같다.

살면서 이런저런 일들이 돌출되지 않을리 만무하지만 

올해는 여러 '관계'에서 오는 은결듬이 유독 도드라진다.

어쩔 도리없는 오해의 배후에는 내 잘못도 은폐되어 있을 것이다.

사랑하고 같이 행복해지려는 것은 그저 연목구어에 불과했던가.

유학생활의 피폐함에서 적첩된 것이란 구실조차 낯이 뜨겁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모든 것을 격해놓고, 

나지막히 '미안하다'는 말을 전한다.






2012. 10. 16. 04:47

10월이 매우 무서운 기색으로 깊게 익어가는 밤이다. 어제 두 시간 밖에 자지 못한데다 아르바이트까지 다녀와서 엄청 피곤한 날이었는데, 한 두어 시간 남짓 잠들었다 그만 다시 깨고 말았다. 소란, 부산, 경망, 반색, 평정, 명멸과 지체 등의 단어가 부단히 교차하고 어지럽게 늘어가는 요즘이다. 짧은 가을과는 이렇게 불콰한 주기에 정체모를 어깨춤을 추는 동안 짧게 조우하고 다시 한 차례 길게 갈라질 것이다. 


은하수로 간다! 나조차 짐작키 어려운 이날들과.




2012. 7. 23. 19:31

올해 들어 별 다른 잔병치레 없이 잘 살았는데, 무더위에 냉방은 궁합이 잘 맞지 않는가 보다.

그제부터 슬슬 몸이 안 좋더니 오늘부터는 도저히 아무 것도 못하겠다. 

자야지.

2012. 7. 11. 21:49

이번 무더위 초입에서 맺게 된 새로운 인연들의 둥지이다. 술에 취한 내 모습이 어색하다. 맨얼굴의 멀쩡한 사진이 없는 게 아쉽다.ㅋ 꽤 흥미로운 포스팅들이 많아 보인다. 내 이름 구글링하다가 포스팅 발견! 덕분에 잠시 마음의 더위를 식힐 수 있었다. 상하이에서 열심히 살다가 겨울에는 부산에 한 번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http://sanzinibook.tistory.com/580


2012. 6. 17. 21:03

학부시절 북경 교환학생 할 때 같은 방을 썼던 일본인 룸메이트가 작년에 결혼해서 올 1월에 낳았다던 아이다. 성별을 안 알려줘서 모르겠는데, 무척 귀엽다. 와이프 데리고 나 보러 한국 오고 싶어하는데 올 여름에도 한국에 들어가질 않으니 천상 내년 초에 오라고 해야겠다. 방금 전화가 와서 통화했는데, 남자아이란다.ㅎㅎ 7년 전에 갔던 나고야에도 한 번 가야 하는데 졸업하고나 기회가 생기겠지. 




2012. 6. 8. 06:07

한 이틀 문서작업을 좀 하느라 밤을 새게 된다. 한 이틀 더 보완해야 할 것 같은데 오늘은 여기까지. 17층에서 폰으로 내려찍은 기숙사 아래 인근 전경이다. 내일부터는 다시 아침에 기상해야지. 눈꺼풀이 무겁다. 이젠 정말 여름인 것 같다.

"cfile10.uf@124B88364FD117DD0E7E4A.jpg"


2012. 6. 5. 03:12

3년 전 쯤이던가, 출근을 하기 위해 마시는 술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란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러기 위해 마시는 술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에는 3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입장의 변함이 없다. 이번 봄 들어 술이 부쩍 늘었다. 술을 원래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았고,(물론 대학원 석사 입학 이후 꾸준히 늘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또 평소에는 그닥 찾지도 않는 것이 술이었다. 그런데 근래 나는 혼자서 가끔 술을 찾기 시작했다. 지금은 즐겁기 위해 술을 마신다. 


많은 사람들이 잠시나마 시름을 덜기 위해 술을 마신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내게 있어 통용되지 않는 정의다. 요즘의 나는 즐겁기 위해 술을 마신다. 번민과 괴로움을 덜기 위해 마시는 술은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다. 지금의 나는 즐겁기 위해 술을 마신다. 참으로 의미있는 술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것은 복선도 암시도 아닌, 앙상한 진심일 따름이다.




후배 창주가 휴대폰으로 찍어준 마지막 발표수업 2012년 6월 5일 화요일 오전  - '전지구적 자본주의 모델의 위기' (당대국제관계이론-석사반 보충과목 이수) 


세 차례 출석과 텀페이퍼가 남았지만, 이제 학위논문과 관련된 일정 제외하고는 모두 끝났다. 시원섭섭하다. (저녁 8시 40분 추신)



2012. 6. 3. 04:27

나는 매일 일상에서 태어나 일상에서 죽는다. 

좁은 창밖으로 보이는 어둠은 내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별이 보이지 않는 도시의 밤은 참으로 황량하기 그지없다 

간간히 들리는 차량의 경적과 질주의 소리만을 벗삼는다

가끔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능히 견딜 수 있다

기숙사의 하얀 벽이 살가운 새벽이다.

 

2012. 5. 8. 02:19

밤이 깊어가는 그 시점에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내릴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이 새삼스러운 의아함은 뭐람. 요즘은 적당히 방심하고 긴장한 채 살고 있다. 의미없이 내뱉어지는 말 속에 진실이 내포되어 있기 마련이지만, 허구적 사실일 뿐이다. 빗방울이 조금씩 굵어지면 날이 밝아올까, 아니면 날이 밝아오면 더 약해질까. 또 모르지. 언제나 삶은 사소함에 요동치면서도 적요의 짙은 색깔이 깃들여져 있다. 멀리 보이는 가로등에 빗방울이 묻어나는 것이 보인다.물론 농담(弄談)이다. 그와 함께 오늘이라는 농담(濃淡)이 자라난다. 

 

 죽은 이선생님이 이런 얘기를 했었다.

숲속에 마른 열매 하나가 툭 떨어졌다. 나무 밑에 있던 여우가 그 소리에 깜짝 놀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멀리서 호랑이가 그 여우를 보았다. 꾀보 여우가 저렇게 다급하게 뛸 때는 분명 굉장한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호랑이도 뛰기 시작했다. 호랑이의 뛰는 모습을 숲속 동물들이 보았다. 산중호걸인 호랑이가 저렇게 도망을 칠 정도면 굉장한 천지지변이거나 외계인의 출현이다. 그래서 숲속의 모든 동물이 다 뛰었다. 온 숲이 뒤집혀졌고 숲은 그 숲이 생긴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삶도 그런 것이다.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니 뜻을 캐내려고 애쓰지 마라. 삶은 농담인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울고 있는 순간까지도 라디오는 60년대가 가고 70년대가 온다는 얘기를 떠들어대고 있었다. 나는 그런 구획의 의미를 애써 생각해보았다. 만약 그 옛날 기원을 정할 때 조금 앞이나 뒤로 잡았다면(물론 지극히 사소한 이유로) 70년대는 이미 왔거나 혹은 아직 오지 않았다. 시간의 구분은 사물의 뜻을 공유하고 분류하기 위해 고안한 일종의 장치일 뿐이다. 절대시간이란 것은 없다. 그런데 70년대가 오면 새로운 삶이 시작되기라도 할 듯이 떠들어대는 저 사람들. 70년대라고? 새로운 농담인가?

 

은희경, 새의 선물, pp.404-405. (서울: 문학동네, 1995) 

 

 

 

회기동 단편선 - 이상한 목

2012. 4. 22. 00:04

그냥이란 말로 대신한다

그냥 그랬다

그냥 그렇다

그냥 그럴 것이다

그냥 그냥 그냥...

대신 말한다 그냥

2012. 4. 7. 01:17

생각해 보니 수많은 강박관념들이 이 봄을 산란하게 만든다.  농약처럼 치명적인 풍경이다. 허나 대체로 레토릭에 불과하다.

2012. 2. 19. 16:29
아무리 옅은 관계라도 내가 무리해서라도 부여 잡으려는 이유가 무엇일까에 대해 여러 차례 생각해 봤었다. 아마 일찌감치 관계망이라는 그물의 허약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느끼고 나면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대체로 환멸 뿐이다. 인간은 이 부분에 이르면 대체로 자신이 끔찍하게 아끼는 몇몇의 존재에 삶을 의탁하고는 한다. 나도 자유롭지 못하다. 더구나 관계가 중심인 동양사회에서 최후의 보루인 가족과도 갈등을 빚는 경우가 현대사회에서는 비일비재하다. 그렇다고 구조의 문제라 해서 세상은 미쳤다고 해 버리면 마음은 편하겠지만 그 뿐이다. 그렇다 한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인도 가서 살거나, 이 세상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고 단정해 버릴 수 밖에 없다. 그럼 우리가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의 이유조차 없어지고 만다. 나는 여기에서 새로운 답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나온 결론이 상처를 주고받는 악순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을지라도 개인적인 차원에서 내가 먼저 노력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조금은 나은 세상을 희망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관계의 파열이 있을 때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만다. 의미 없을 뿐인 누구의 잘잘못을 가리기도 전에 찾아오는 것은 자기분열 뿐이다. 이 때는 견해의 차이도 좁힐 수 없고, 각자의 컴플렉스를 인정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저 이 짜증나는 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하고 바란다. 어느 누가 가식적이라 해도 손가락질 해도 좋지만, 적어도 난 상처를 받은 것보다 줬다는 것이 더 견디기 힘들다. 이것 역시 웃기는 짬뽕이다. 정신적으로 어떤 병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그렇게 생겨먹었다. 단순히 외로움을 털어내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난 누군가와 거리좁히기를 시도하는 것이 마치 나의 불치병이 된 것 같다. 이건 공부를 통한 성찰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기 때문일까. 이론과 실제를 접목한 성찰이 도대체 가능한 것인가. 의문투성이다.

보충: 한 가지 새벽에 쓴 글 중에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어차피 논쟁이 아닌 싸움으로 전이되었고, 설득하려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라면 막말을 좀 들었다고 해서 상대의 화법을 가지고 예의 운운했던 것은 내 스스로 지나치게 봉건적이고 전근대적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여하튼 남자란 성별이나 나이의 많고적음에 의지하는 것은 매우 저열한 행위이다. 우리의 관계는 호의 어쩌구 하며 어물쩡 넘어갈 성숙한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이상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있겠지만, 그때는 논리에는 논리로, 정서에는 정서로 마주하면 된다.
2012. 2. 19. 05:09
고등학교 친구 중에 곧 결혼하는 친구가 있어 술자리에 다녀온 뒤 잠들었다 참 애매한 시간에 깼다. 
 
간혹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어 오버페이스 하는 경우가 발생하고는 한다. 그래서 오해가 발생하고, 인간관계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아마 내가 이런 오류를 범했었나 보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다 자신은 다른 보통의 여성과 다르다고 하길래, 난 그런 생각은 위험하지 않겠느냐 했다.  인간적호의가 없었다면 이런 얘기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를 두고 그는 나라고 특정하진 않았지만 단일민족 컴플렉스, "인간은 평등하다.", "어딜 가도 다 비슷하다", "거기서 거기다"는 보편론에 기대어 타인의 개인생활/정신영역을 침범하는 행동을 했다고 자신의 블로그에서 언급했다. 전후사정이 어찌 되었든, 이에 대해 50%인정한다. 나는 적어도 생산적인 대화와 논쟁이 가능한 관계라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 상대방이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했으니 말이다. 먼저 충분히 배려하고 존중하지 못했으니 설사 情이라 하였다 하더라도 이는 전적으로 내 잘못이다. 그러나 그 역시 얼치기 다원주의에 기대어 타인의 진심이 담긴 호의를 곡해하지 않았나. 그 스스로도 나에게 그랬다. 자신이 최근에 다른 일로 예민했으니, 곧 아무 생각없는 자기로 돌아갈 것이라고... 난 이 말을 서로를 좀 더 알아가기 위한 사적인 겸양의 표현이라 생각했다. 나 역시 그렇게 화답하려 했던 것이고... 마냥 어리다고 치부하기에는 실체적 삶의 경험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결핍되었고,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못한 사람을 대할 때면 당혹스럽다. 타인과 소통하려는 의지와 열정이 있는 청춘일거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철저히 귀를 닫고 논리와 전제의 기본개념조차 혼동하면서  자신의 일천한 경험에 의거 사회적 수사학만 난무한 사람인 것 같아 나도 더 이상 어찌 대응해야 할 지 모르겠다. 자신 스스로 퍽 다른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여기면서 사적인 영역에서조차 자신의 글에 책임을 지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글을 쓸 자격이 없다. 이것은 '사회적' 권고이니, 사적영역을 침범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글을 쓰려는 사람이 문장이 얼마나 날카로운 흉기인지 왜 모르는가. 이렇게 휘두르는 것을 원했던 거니?      
2012. 2. 12. 03:38

한 일주일 채 지나지 않았던가
내 자신도 전혀 알지 못했던
찰나이고, 순간이며 한토막을 우연히 포착하였다
너무나 짧은 것이라 퍽이나 아쉽지만
일상의 중요한 한대목을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다
침소봉대라 하더라도 자꾸만 미소를 머금게 된다    
2012. 2. 3. 03:27
한파라는데 그리고 나가보면 춥긴 정말 추운데 상하이에서 겨울을 두 번 보내고 나니까 그냥 무덤덤하다. 일단 실내에 있으면 기본적인 온기가 있으니까 그런 듯 싶다. 방에서 옷 다 입는 것이 버릇이 되다 보니 한국에서도 이렇게 지낸다. 이런거 보면 이제 상하이 라오바이씽이 다 됐나보다. 방금 최민식, 하정우 주연의 '범죄와의 전쟁'이란 영화를 심야에 보고 들어왔다. 이렇게 동네 영화관으로 혼자 출동한 것이 벌써 네 번째다. 가기 전에 영화는 실컷 보고 가리라 마음 먹은 탓이다. 예전에는 좀 골라보는 편이었는데, 지금은 대충 보고 잼날 거 같으면 무조건 간다. 다음 주 화요일에 서울 병원 갔다가 시간되면 소극장에서 앵콜로 하고 있는 '만추'도 보고 갈 것이다. 3월에 중국 개봉하면 중국에서도 봐야지. 

내가 블로그를 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삶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적고, 또 생각을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를 댄다면 이 블로그를 통해 알게 된 이웃들이나 오프라인에서 이미 알고 있는 지인들의 블로그에 가끔 마실 다니는 쏠쏠한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공부 얘기만 주로 하는 사람도 있고, 또 자기가 현재 하는 일 얘기만 하는 사람도 있고, 이것저것 섞어서 하는 사람도 있고 다양하다. 대부분 나만큼 사적인 이야기를 과도하게 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한 차례씩 휙 돌면서 소식을 접할 때마다 그들의 삶을 보는 거 같아 즐겁다. 공부 이야기에, 일 이야기에, 그 어떤 것이라도 설사 그들이 의도하지 않았다 할 지라도 그네들의 근황이 녹아 있다. 가끔 내 블로그를 보면서 자극이 된다고 이야기 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나 역시 이 사람들의 블로그를 다니면서 사람냄새를 맡는다. 그리고 이를 통해 삶은 치열하게 살아야 하지만, 때로는 그렇게까지 치열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도 느낀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이 유행이라지만 여전히 이 곳을 지키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블로그는 디지털 속의 아날로그라 해도 좋을 듯 싶다. 

한편, 동네 지역도서관에 쉬엄쉬엄 다니고 있다. 기말 숙제 하나 던지고, 하나를 더 해야 하는데 자꾸 논문 쪽으로 신경이 쓰인다. 방학동안 수정해서 지도교수한테 보내주기로 해서 그런 것도 있고 어차피 앞으로 1~2년은 모든 일상이 논문으로 굴러갈 것이기 때문이다. 기왕 공부를 한 이상 적어도 부끄럽지 않은 논문은 쓰고 싶은 것이 사람 욕심이다. 문제의식이 있더라도 늘 문제는 논점을 이끌어 갈 스토리가 문제다. 스토리가 조금만 독창적이면, 술술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영감이 떠오를 것 같으면서 영 부실하다. 여전히 공부의 수준이 천박해서 그런 것일테지만, 그래도 어느 날 그래~이거다 하며 혼자 미친듯이 웃으며 "보고있나? 학문의 대가들."이라 외치며 스스로를 천재의 반열에 올려놓는 뿌잉뿌잉 하의실종쇼 쯤은 한 번 벌이고 싶다.         
2012. 1. 31. 03:33

날짜를 헤아려 보니 벌써 집에 온 지도 18일째가 되었다. 그동안 정말 푹 쉬었다. 게다가 날 반가워 해주는 많은 친구와 선후배들을 만났다. 다만 주로 단체로 만나다 보니 내밀한 이야기보다는 조금은 분산된 형태의 이야기들이 주된 것이었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래도 얼굴만 봐도 즐거운 친구들을 만나서 좋았다. 이제 거진 다 보고 몇몇 아직 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그네들을 만나는 와중에 한국에서의 체류는 이렇게 저물고 말겠지만, 여튼 지난 해보다 더 많은 충전이 된 것은 사실이다. 역시 사람은 언제나 소중하면서도 소중하지 않다. 내가 애정을 드러내며, 내게 애정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많은 위안이 되었고, 또한 세월 혹은 사람의 변화  혹은 이해 타산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경우에는 실망보다는 안타까움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모두가 다 팍팍한 삶에서 기인한 것이니 탓하는 것도 어렵다. 나 역시 나 바쁘다는 이유로 그네들 일상의 변화를, 혹은 근심과 걱정을 채 살피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모두 고맙고 반갑다. 다시 일 년을 시작해야 하고, 그리고 내 블로그에 마실 오지 않는 친구들이 대다수라 모를 것이지만... 난 여전히 내 자신에 주로 빠져 있어 지인들의 일상과 슬픔을 다 챙기지 못하지만, 훗날 이 웬수는 반드시 갚을 것이다.   

2011. 12. 10. 02:54
상해도 이제 완연한 겨울로 접어 들어 이틀 째 거의 방 안에서 칩거하다시피  한다. 물론 오늘은 조금이라도 걷고 싶어서 추위를 무릅쓰고 반찬을 사러 다녀왔는데 감기 기운이 도는 것 같아 괜히 나간 거 아닌가 하고 있다. 오랜만에 모처럼 시간이 나서 아는 사람들 블로그를 구경 다니다가 매우 인상적인 것을 두 가지 보게 되었다. 




 
사진을 찾으려 검색하다 보니 이 보도가 3년이 넘은 통계라는 걸 알게 되었다. 3년이 지났다고 한국사회 평범한 이들의 양태가 별반 달라진 게 있을까 싶다.  이 사진을 처음 보게 해 준 그네의 포스팅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즉각적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곧 이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가 깨달았다."고... 그리고 이어서 "요즘 유행하는 말로, 나는 인생을 글로 배웠다. 문제가 생겼을 때, 문제를 둘러싼 상황과 구조를 파악할 수는 있지만, 해결할 힘이 없다. 행동이 없다. 걱정이 너무 많아서 미래가 두렵다. 인생이 무섭다."고 했다. 

이 표현에 지극히 동감한다. 물론 내가 그네보다 좀 더 살았다는 단순한 이유 하나로 난 즉각 웃음이 터지진 않았다. 그러나 나도 그네처럼 인생의 많은 부분을 글로 배운 축에 속한다. 내가 적극 옹호할 수 있는 것은 역시나 내가 겪어 온 세대이고, 간접적으로는 자라오면서 부모님의 모습에서 이런 것들을 읽어왔다. 하지만 역으로 글로 인생을 쓸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서로 알릴 수 있다는 점에서는 글이 주는 효용성을 변호하고 싶다. '뿌리깊은 나무'의 영향이 아닐까도 싶다만. 여튼 어떤 의미에서는 처절한 회한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에도 동의한다. 그렇지만 후회하지 않는 삶이 있을 수 있을까. 아마도 후회없이 살았다고 주문을 외우거나 착각을 하고 사는 것이 대부분이지 않을까 싶다.

http://www.82cook.com/entiz/read.php?bn=15&num=1130627&page=4

역시 같은 블로그에서 링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이렇게 적고 있다. "여자를 한없이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보는 것, 그게 뭔지 나는 안다. 그게 나의 시세포와 혈관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나는 안다. 정확하게 그 느낌을 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반하지도 않았고 반했던 내가 미쳤구나 라는 생각이 표정에 드러나고 행동에 묻어나고 서로에게 기대만 많은 이방인들처럼 멀어지고만 있는 것 같아요'를 상상해 보니 숨이 탁 막히고 미칠 것 같았다."
 
여성의 관점을 잘 표현한 것 같다. 난 여성의 관점을 글로도 배웠고, 인생으로도 배워가고 있다. 여성들은 대체로 사랑에서 행복을 느끼는 비중이 거의 압도적이지 않을까 싶다. 남성들도 사랑에서 행복을 느끼지만, 여성처럼 그 비율이 높지는 않을 것 같다. 남성들이 중요시하는 가치들을 사랑과 동일한 선상에서 놓고 잘 조절할 수 있다면, 또 여성들 역시 조금은 그 기대감을 버리고 바라볼 수 있다면 어떨까란 생각을 해 본적이 있다. 링크의 글처럼 서로가 서로를 끝없이 경외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일상의 수많은 다툼도 슬기롭게 풀리지 않을까. 그런데 이게 말이 쉽지, 보통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된다. 

무의미할 수도 있겠지만 난 글로 다짐한다.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만약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함께 좀 더 많은 걸 극복하고 같이 누렸으면 좋겠다고.  
2011. 11. 13. 02:11
기현이가 이곳에 출장을 와서 한 이틀 재미있게 놀았다. 이렇게 술술술~ 가을이 가고, 술술술~ 겨울이 올 터.
2011. 10. 31. 03:40
이와 유사한 제목의 노래를 아래에 링크하였다. 다시 홍역 앓듯이 보내는 가을의 한복판이다. 사실 내가 서 있는 이 곳은 온도 이외에는 가을의 고즈넉함을 말해주는 마땅한 대목이 없다. 그래서 여름과 겨울 이외에는 계절의 변화를 수십 년간 살아온 삶의 직관으로 밖에 판별할 수 밖에 없다. 그래도 오늘은 꽤 날씨가 좋았던 탓인지 내가 한 해의 이런 지점에 와 있구나란 순간의 생각을 했었다. 그러던 차 인터넷뉴스에서 나는 가수다 프로그램에서 이소라가 이현우의 '슬픔 속에 그댈 지워야만 해'이란 곡을 리메이크 해 다시 불렀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다시 이 노래 부분만 켜놓고 감상을 했다. 1절 가사를 아래에다 옮긴다. 특히 도입부의 가사가 인상적이다.
(창가에 불어오는 가을바람은 텅 빈 마음을 스쳐 가는데, 차가워진 벽에 기대어 멀리 밝아오는 새벽하늘 바라보아요.) 보고 싶지만 가까이 갈 수 없어. 이제는 그대 곁을 떠나가야 해. 외로웠었던 내 메마른 그 두 눈에 크고 따뜻한 사랑을 주었던. 그대 곁을 이제 떠나는 것을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그댈 사랑하기 때문이야. 그대만을 사랑하는 걸. 잊을 수는 없지만 슬픔속에 그댈 지워야만 해.
근래의 내 새벽 행동패턴을 굳이 언어로 표현한다면 위 괄호 안의 가사가 딱이다. 누군가를 애써 지워야 할 일은 없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인 일이어야 하는 건가 싶다. 하지만 정말 행복하지 않은 사실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없다는 것에 있을 터. 굳이 사랑을 하지 않아도 좋다. 그저 절대고독에 매몰되지 않고 내 마음의 온유를 조금이라도 되찾을 수 있다면, 계절이 빛과 같은 속도로 깊어져 가는 것에 이렇게 섭섭함을 표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길을 오가다 혹은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게 되는 사람들을 스쳐 지나 보낸 뒤에는 종종 따뜻한 인사 한 마디라도 건넬 걸 하는 아쉬움이 든다. 그래서 홀로 가을에 미리 작별의 인사를 건넨다. 잘 가~ 나도 잘 있을게라고. 그리고 내년에는 좀 더 일찍 눈치 채겠노라고.
  
http://www.zzacnoon.net/155 
2011. 10. 6. 03:25
1. 陶演, 상해말로는 도도(Dodo)라는 애칭을 가진 상하이 여학생을 루구후에서 만났었다.  나를 무척이나 좋아해줬지만, 끝내 오늘 밤 이 땅을 떠나 베를린자유대학으로 향했다. 사실 사람은 떠나고 추억만 남을까 만나길 꺼려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결국 추억만 남게 되었다.  짧은 인연이었지만, 오늘 내 앞에서 흘린 그녀의 눈물은 내 방에서 정지했다. 그녀의 유학생활이 平淡如水하길 바란다.

2. 胡颖이란 친구도 오늘 만났다. 역시 루구후에서 만난 친구다. 그러고 보면 루구후에서 꽤나 많은 사람들과 조우했다. 항저우에서 일을 시작한 지 반 개월 되었다는데, 히치하이킹과 무전여행을 즐기던 친구이다. 같이 온 林强이란 친구와 루구후에서 만났었다. 이 친구와는 항상 필담을 나누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필담을 나누었다. 진즉 수화를 배워두지 않았던 것이 아쉽다. 하지만 이대로도 충분하다.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은 단지 말을 하고 들을 수 있는 우리 뿐이다. 누가 더 불편하고, 편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3. 루구후에서 만난 친구들은 앞으로도 살면서 좋은 친구가 될 것이다. 술을 마시고 있던 친구들과 합류하여 간단히 한 잔 마시고 왔다.  저녁도 꽤나 먹을만큼 먹었고, 술을 조금 마시면서도 안주를 계속 먹었음에도 공복감을 느껴 집에 들어와 밥을 퍼서 간단히 먹었다. 가끔은 이게 정말 신체적 공복감인지 아니면 정신적 공허함인지 헷갈린다. 우리는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고 여기지만, 난 사실 사는 게 불분명의 연속이라 생각한다. 분명하다고 믿는 게 있어야 비로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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