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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2. 19. 16:29
아무리 옅은 관계라도 내가 무리해서라도 부여 잡으려는 이유가 무엇일까에 대해 여러 차례 생각해 봤었다. 아마 일찌감치 관계망이라는 그물의 허약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느끼고 나면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대체로 환멸 뿐이다. 인간은 이 부분에 이르면 대체로 자신이 끔찍하게 아끼는 몇몇의 존재에 삶을 의탁하고는 한다. 나도 자유롭지 못하다. 더구나 관계가 중심인 동양사회에서 최후의 보루인 가족과도 갈등을 빚는 경우가 현대사회에서는 비일비재하다. 그렇다고 구조의 문제라 해서 세상은 미쳤다고 해 버리면 마음은 편하겠지만 그 뿐이다. 그렇다 한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인도 가서 살거나, 이 세상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고 단정해 버릴 수 밖에 없다. 그럼 우리가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의 이유조차 없어지고 만다. 나는 여기에서 새로운 답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나온 결론이 상처를 주고받는 악순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을지라도 개인적인 차원에서 내가 먼저 노력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조금은 나은 세상을 희망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관계의 파열이 있을 때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만다. 의미 없을 뿐인 누구의 잘잘못을 가리기도 전에 찾아오는 것은 자기분열 뿐이다. 이 때는 견해의 차이도 좁힐 수 없고, 각자의 컴플렉스를 인정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저 이 짜증나는 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하고 바란다. 어느 누가 가식적이라 해도 손가락질 해도 좋지만, 적어도 난 상처를 받은 것보다 줬다는 것이 더 견디기 힘들다. 이것 역시 웃기는 짬뽕이다. 정신적으로 어떤 병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그렇게 생겨먹었다. 단순히 외로움을 털어내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난 누군가와 거리좁히기를 시도하는 것이 마치 나의 불치병이 된 것 같다. 이건 공부를 통한 성찰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기 때문일까. 이론과 실제를 접목한 성찰이 도대체 가능한 것인가. 의문투성이다.

보충: 한 가지 새벽에 쓴 글 중에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어차피 논쟁이 아닌 싸움으로 전이되었고, 설득하려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라면 막말을 좀 들었다고 해서 상대의 화법을 가지고 예의 운운했던 것은 내 스스로 지나치게 봉건적이고 전근대적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여하튼 남자란 성별이나 나이의 많고적음에 의지하는 것은 매우 저열한 행위이다. 우리의 관계는 호의 어쩌구 하며 어물쩡 넘어갈 성숙한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이상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있겠지만, 그때는 논리에는 논리로, 정서에는 정서로 마주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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