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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회세미나 기말고사 준비자료140618.hwp



2014. 5. 22. 20:26

목원대 - 현대중국정치의 이해 기말고사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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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중국정치의 이해 기말고사 자료-목원대140618.hwp


2014. 3. 25. 14:23


1. 짱깨


짜장면 먹방을 이곳저곳에서 시전중인 가운데 한 사람이 짱깨라는 용어를 쓰는 걸 보고 생각나 적는다. 우리나라에서 중국인을 무의식 중에 비하하는 두 개의 용어가 있다. 우선 하나는 '짱깨'이다. 짱깨는 보통 장궤(藏柜, zàng guì)라고 발음하는 옛날식 궤짝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보다 알려진 설은 가게 주인을 일컫는 장궤(掌柜, zhǎng guì)이다. 


2. 짱꼴라 


그렇다면 짱꼴라는 무엇인가. 짱꼴라는 청나라의 한족이 황제 앞에서 스스로를 노재(奴才)라고 한데서 기인한다. 일본인은 이를 응용해 청나라의 노예란 뜻을 가진 '칭궈누'(淸國奴)를 사용했는데, 일본사람은 이를 '잔코로'로 발음했다고 한다. 이것이 한국으로 넘어오면서 '짱꼴라'(葬骨人)로 변형되었다.


이 밖에 한국에서는 '되놈'이라고 하는 표현도 있다. 얕잡아 보던 여진족이 청나라를 세우고 병자호란 이후 중국인 전체를 싸잡아 욕할 때 쓰는 표현으로 자리잡았는데, 변형된 형태로 '떼놈'이라고도 한다.


3. 가오리방쯔(高丽棒子)

이와 반대로 중국인들이 한국인을 비하하는 말은 가오리방쯔(또는 고려방자)이다. 우리가 짱깨와 짱꼴라를 위키백과에서 간략하게 소개한 것에 비해 중국 넷상에서는 이 단어의 유래를 폭넓게 설명하고 있다. 대략 3가지 설이 있는데, 가장 많이 알려진 이야기는 명청(明淸)시기 중국에 방문한 조선사절단 가운데 신분이 비천한 하위직의 조선인을 가리켰던 말이다.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이러한 직위에 있던 조선인이 이른바 사고를 많이 쳤다고 한다. 


두 번째 설은 조선말기 중국으로의 조선인 이주가 증가하고, 일본의 만주진출에 따라 당시 만주지역에서 일본에 협력하던 조선인 경찰을 가리키는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인 경찰을 믿지 못해 총기 지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이 조선인경찰들은 주로 '세탁 방망이'를 들고 다녔고, 이를 본 현지 중국인들이 이들을 그렇게 불렀다고 한데서 유래한다. 중국 측에서는 이 두 번째 설에 대해서는 신빙성이 약하다고 본다. 


세 번째 설은 첫 번째 설과 유사한 것으로 생략한다. 


무튼 무의식 중에 '짱깨'란 말 또는 '짱꼴라'라고 쓰기 보다는, '중국짜장면' 또는 '중국인'을 먼저 사용한다면, 중국인들이 한국사람을 가오리방쯔라고 부르는 일도 적어지지 않을까. 


아래 사진은 청대 문헌에 기재된 '고려방자'에 대한 기록.


*이 글은 우리나라의 위키백과와 중국의 바이두백과를 참고해 적었다.*




2014. 3. 24. 16:49

얼마 전에 공유한 바 있던 '차이나 핸드북, (김영사)'을 배송받아 보는 중이다. 이 책은 개황, 현대사, 정치, 외교, 사회, 경제, 문화, 한중관계 8개 분야에 걸쳐 현대중국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울러 47페이지에 걸쳐 '18차 전국대표대회와 시진핑 시대의 중국 전망'이라는 제목으로 특집을 전반부에 싣고 있다. 앞부분의 특집 편을 다 읽어보고, 분야별로 한 꼭지 정도씩 읽어본 정도에 불과해 아직 이 책에 뭐라 단언하기 힘들지만, 몇 가지 보충해야 할 점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1. 우선 이 책은 '쟁점이 있는 공구서'를 표방하고 있다. 여러 영역과 층차에 있어 중국에 대한 다양한 접근을 시도한 것은 좋았지만, 다소 어렵다는 인상을 받았다. 만약 이 책이 이희옥 성균중국연구소장이 발간사에서 언급한 대상 독자 가운데 '중국을 공부하는 학생(5쪽)'이 학부생을 포괄한다면, 학부생들의 눈높이에서 공부하기에는 배경설명이 너무 없다. 중국에 대한 이해도가 다소 높은 독자들이라면 크게 무리 없이 읽어나갈 수 있을지 몰라도, 아직 체계적인 지식축적이 되지 않은 학생들이 차분히 읽는 데 난관이 좀 있지 않을까 싶다.


2. 책의 구성에 있어 현대사와 문화 분야의 분량이 다른 분야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인다. 앞으로 특집과 다른 부문을 줄여서라도 현대사와 문화 분야를 좀 더 강화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3. 지면제약으로 인해 많은 부분이 생략된 것으로 판단된다. 표와 그림이 적절하게 사용되었지만, 학생들의 가독성을 높이고, 효과적인 이해 도모를 위해서 각종 '사진 자료'가 실렸다면 어땠겠느냔 생각이 든다. 2년마다 이 책의 내용을 업데이트하고 확장할 것이라고 했는데 다음에 개정판이 나오게 된다면 특집 부분을 과감히 없애고, 그만큼의 지면에 사진자료를 실어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었으면 한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기획력이 돋보인다. 공구서로의 역할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현장에서 교수자와 교습자 모두의 편의를 도모할 수 있도록 각종 사진 자료를 한 장의 CD로 만들어 책 뒷부분에 첨부하는 형식도 나쁘지 않을 듯싶다. 전체 항목이 104개로 이루어졌으니, 각 항목당 한 장의 사진 자료만 첨부해도 실용적인 가격으로 다시 내놓을 수 있지 않을까. 


5. 여담이지만, 판매지수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예스24와 알라딘을 보니 최근 나온 중국 관련 서적 중에 판매지수가 가장 높은 듯싶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4966750



2013. 12. 2. 16:28

  올해 2월 3차 북핵실험으로부터 출발한 동북아 지역의 안보불안이 일본의 집단자위권 추진과 동중국해 상 중일 간의 연이은 해상충돌, 그리고 최근 중국의 일방적 방공식별구역(CADIZ) 선포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은 여론에 떠밀려 이어도를 포함하는 방공식별구역(KADIZ)의 확대와 TPP 참여 카드 패를 던지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전략적으로 둘 다 주변 강대국의 반발을 초래한다는 점에 있어 적절한 조치로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주변 강대국의 조치들이 내부적 결속을 위해 나온 산물임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한편, 올해 5월경 팟캐스트 13회 윤여준 편에 연세대 문정인 교수가 출연해 한국의 생존전략으로 아래의 4가지 방안이 있다고 한 적이 있다.

 

 

1. 균형(balancing) - 미국에 동조하여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와 균형을 가하는 것.

2. 편승(bandwagoning) - 부상하는 중국에 편승, 중국중심의 세계체제 속에서의 이익 도모.

3. 독자생존(standing-alone) - 강대국 세력에 휩쓸리지 않고 말 그대로 독자생존의 길을 추구.

4. 현상유지(satus-quo) - 종전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이익은 중국에서, 안보적 이익은 미국에서 취함.

 

 

  문정인은 당시 이 4가지 생존전략 모두 한계가 있다고 보면서 '유럽식의 동북아 안보 다자협력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한국에서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중국연구자인 서울대 조영남 교수는 2012년 출간한 '용과 춤을 추자: 한국의 눈으로 중국읽기'와 2013년 최근 출간된 '중국의 꿈'의 저서를 통해 '정책 3중주'를 주장하기도 했다. 조영남의 정책 3중주는 한국이 부상하는 중국에 대해 관여(engagement), 위험분산(hedging), 동아시아 다자주의(multilateralism)의 3가지 정책을 동시에 또한 균형 있게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리고 대다수 중국연구자를 비롯한 정책담당자들은 네 번째 전략인 현상유지를 선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주장 역시 한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먼저 문정인이 말하는 유럽식의 동북아 안보 다자협력체제는 한중일이 중심이 되는 체제인데 일본과 중국이 과연 협력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남는다. 물론 현실적으로 그렇게만 된다면 1세기 가까이 지속해 온 미국의 동북아지역 개입이 무너뜨리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미국도 이런 방향을 가장 우려한다. 이 안은 중국이 중심이 되지만 동아시아세력에 의한 동아시아 새 판도를 짤 수 있기는 하다.

 

 

  조영남의 생존전략은 이론적으로 나쁘지는 않지만, 정책적 반영에 있어 많은 회의가 드는 방안이다. 아울러 현상유지 방안과 마찬가지로 한국이 회색분자로 오인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개인적으로는 위에서 언급된 '독자생존' 방안에 대한 지지를 표한다. 가장 불투명한 길이긴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핵무기 개발이 없는 독자생존의 추구, 북핵문제를 비롯한 남북관계의 개선, 통일에 대한 방향성 등을 큰 축으로 삼아야 한다. 다른 강대국의 충돌 속에서 어이없는 희생물이 될 바에야 미래를 예측하기 힘들어도 우리의 길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 가장 후회가 덜 남는 길이 되지 않겠는가.

 

 

  이런 생존전략을 위해 남북관계를 비롯한 앞으로 한국의 생존전략과 관련해 '대토론과 논쟁'을 통한 '담론형성'이 시급하다고 본다. 현재의 '현상유지'전략으로는 이제 오래 버틸 수 없을 것이다. 국가 생존이 달린 문제인만큼 좌우를 포괄하는 전략을 세워야 하는 것은 분명한데 우리가 이런 국제적 문제에 많은 힘을 쏟을 사회적 역량을 갖추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2013. 10. 1. 15:14

언제인가부터 베스트셀러 10위권 안에 드는 책은 구매해서 보는 일은 하지 않았다. 왜냐면 실제보다 과장된 책이 많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이번 조정래의 신작 '정글만리'의 경우는 전공인 중국과 관련돼 있다고 하길래 안 볼 수 없어 보긴 했다. 하지만 내심 조정래의 아리랑, 태백산맥, 한강의 대하 시리즈물을 좋아했던 사람으로 어느 정도는 기대심리도 있었다. 하지만 읽고 나서 '소설 특유의 재미'에 있어서 전작 한국경제를 다룬 '허수아비춤'과 유사하게 망가진 작품이다는 생각을 했다. 이 소설에 대해 장황하게 언급할 가치까지 느끼지 못하지만, 그래도 두 달 사이에 50만 권이나 팔렸고, 60만 권의 판매 부수는 무난히 넘기리라 생각되는 소설에 대해 짧게라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글을 남긴다. 


1. 20세기적 글쓰기:

문학창작에 있어서 문외한이라 그의 작품특성을 전문적으로 어찌 평가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의 소설은 이제 유효기간을 넘겼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는 바로 '20세기적 글쓰기'에 있었다. 시대의 변화를 외면하고 그의 글쓰기는 1980년대에 머물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를테면 '~해서 좋소','~말이오'등의 문체가 과연 변화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물론 이것은 전적으로 작가 자신 선택의 문제이지만, 이런 문체들이 소설 안에서의 남성적 성향을 지닌 인물들과 조합되면서 무대는 2010년 이후이나 여전히 구시대적 느낌을 물씬 풍겼다. 그야말로 21세기에 20세기적 글쓰기가 아닐 수 없다. 


2. 서사의 부재:

사실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는 서사가 없다는 것이다. 개혁개방의 정글만리 중국에서 활동하는 5개국의 비즈니스맨들과 그들의 주변인물들을 통해 나타내려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아마 작가는 그들의 입을 통해 중국과 중국인을 말하고자 했겠지만, 3권의 책 안에 너무 많은 중국이야기를 담으려다 보니 소설에서 요구되는 인물 간의 갈등과 인간적 고뇌와 번민도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야기를 관통하는 서사도 부재한다. 그래서 중국이야기는 존재하지만, 흥미진진함과 뒷이야기를 궁금하게 하는 매력적 요소는 거의 없었다. 그저 중국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하는 마음에서 끝까지 본 것에 불과했다. 


3. 정보의 부정확함:

 조정래는 이 소설을 쓴 동기가 한국사람들이 중국을 몰라도 너무 몰라서라고 했다. 하지만 내가 봤을 때 중국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사람은 조정래이다. 그가 2년간 취재하면서 중국을 드나들었다고 하는데 내 생각에는 그 기간 다 합쳐봐야 얼마 되지도 않을 것 같다. 물론 중국연구자들도 새로 접하는 일부 짧은 이야기들을 한데 모아 정리했다는 차원에서 의미가 있고, 그걸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 의의를 두고 있었다면 그럭저럭 수긍할만할 것도 같지만, 만약 그랬다면 제공하는 정보에 최대한 오류가 존재하지 않도록 노력했어야 했다. 그가 제공하는 수많은 중국정보 가운데 틀린 것들이 많다. 특히 2010년 이후의 무대를 보여주면서 각종 수치는 예전의 것을 언급하는 경우가 꽤 보였고, 심지어 잘못된 정보도 더러 있었다. 이런 점에 있어 조정래 작가는 꼼꼼하지 못했다. 


4.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오해에 대한 기여:

조정래는 이 책에서 중국과 중국인에 대해 여러 면에 있어 단정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그리고 주된 인물 가운데 중국인은 이른바 '푸얼다이' 혹은 '빠오파후'로 불리는 부자계층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들의 모습을 통해 중국의 폭발적인 경제성장으로 인한 어두운 면을 드러내고자 했을 테지만, 오히려 이런 점만을 부각한 나머지 수많은 중국의 서민층과 중산층에 대한 이야기는 빠져 있다. 비즈니스맨이 주제다 보니, 작가 자신이 이런 사람들만 만나러 다니면서 부정적인 이야기만 듣고, 또 중국에서의 비즈니스는 돈이 된다는 얘기만 주로 듣고 다녔을 테니 이런 식의 글쓰기밖에 되지 않았다는 의심을 거둘 수 없다. 조정래는 정말 얼마나 다양한 중국인을 만나봤을까. 아마 언어적 한계로 인해 단 한 번의 제대로 된 인터뷰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개혁개방의 공로가 오로지 중국인민에게 있고, 당은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다는 식의 두루뭉술한 결론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 또 IMF 등의 예측 등을 기반으로 2016-2018년이면 중국이 G1이 될 것이라는 확고한 견해는 지극히 단정적이다. 중국이 경제적으로 G1이 되는데 그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할지 모르지만, 총체적인 G1으로서의 중국은 아직 요원하다. 아마 조정래 작가는 G1의 개념조차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던 듯싶다. 

게다가 중국여자는 정조관념도 없다는 막연한 결론 도출에 이르면 정말 할 말이 없어진다. 조정래의 여성에 대한 보수적인 시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5. 작품 전체에 흐르는 계몽주의와 민족주의:

조정래의 스탠스가 딱 여기까지라는 건 모르는 바가 아니었지만, 넘쳐나는 계몽주의와 민족주의는 내내 불편했다. 팔은 안으로 굽어서 그랬던 건지는 몰라도 부상하는 중국과 침체하는 일본 사이에서 활약하는 한국 비즈니스맨들의 진취적이고 열정적인 모습을 강조하고, 일본인은 중국에 와서도 중국어도 못하고 통역만 앞세운다는 비하는 시대착오적이다. 한때 한국유학생보다 더 많던 일본인 유학생은 집에서 살림하거나 국내에서만 일하고 있을까. 물론 발음이나 회화에서 한국인을 쫓아오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독해나 작문실력 등에 있어서는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나은 경우가 더 많다. 작품에 나오는 전대광을 비롯한 한국인은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이토 히데오를 비롯한 일본인 주재원들은 과도하게 비교양적인 인물로 묘사되는 것 역시 유치해서 봐줄 수가 없었다. 조정래의 시대적 사명감은 딱 거기까지인가.


6. 요약:

조정래는 아마도 이 작품을 통해 중국 특색의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고자 했다면 좀 더 신중하고 오랜 공부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다. 중국을 모르는 한국인을 위해 썼다는 책이 오히려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판단을 흐리게 한다면 차라리 세상에 나오지 않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작품과는 별개의 이야기지만 조정래는 '중국 특색의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정작 본인은 '중국 특색의 자본주의'를 빌어와 '한국 특색의 자본주의'의 커다란 수혜자가 된 것 같다. 2권이면 충분할 책을 3권으로 늘리고, 불황인 이 시대에 TV 선전까지 감행하는 한국식 자본주의에는 정작 눈을 감은 셈이 아니던가. 그 자신에게는 경제적으로 큰 보탬이 되는 책이 될 테지만, 동시에 그가 가져왔던 작가적 신망과 존경은 날려버리는 작품이 될 듯싶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개인적으로 시간도 없어 두서없는 글 여기에서 마친다.   

2013. 8. 3. 22:59

올해 4월 초, 북핵문제가 한창 이슈이던 즈음 시사IN의 남문희 기자가 김정은의 이복누이이자 김정일이 총애했던 '김설송'을 집중 조명했던 기사가 나온 적이 있다. 이 기사의 논점은 장성택이 실제 권력에서 배제된 지 오래이고, 현재 북한의 권력을 이끌고 있는 것은 바로 김경희-김설송-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라인이라는 것이다. 이 기사의 진위여부와 관련해서도 이런저런 설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번역을 하고 있는 책이 하나 있는데, 그 가운데 이 문제의 김설송의 존재에 대해 설명한 대목이 있어 그것을 여기에 옮겨본다. 북한과 북핵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참고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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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할 수 있는 것은 김정일에게는 김설송이라는 또 한 명의 딸이 있고, 그녀가 김정일 곁에서 일한다는 것이다. 

그녀의 모친은 도대체 누구인가? 갖가지 추측과 분석이 있다. 비교적 주류적인 견해는 김설송이 김영숙의 소생이란 것이다. 고영희 다음에 김정일은 그보다 22살 어린 네 번째 부인 김영숙을 맞았다. 김영숙은 1964년에 태어나 평양음악무용대학을 졸업하였고, 전공은 피아노였다. 1980년대 초반부터 그녀는 김정일 옆에서 서기 업무를 담당하며 김정일이 국정 처리하는 것을 보좌했다. 김정일이 외국을 방문할 때 김영숙은 조선국방위원회 과장의 이름으로 따라갔다. 2000년 10월,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김정일 특사로 미국에 방문했을 때, 김영숙은 특별한 명령을 받고 국방위원회 과장으로 미국에 동행했다. 2005년 7월 김정일이 한국의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을 접견할 때에도 그녀는 참석했다. 2006년 1월, 김정일이 중국에 방문했을 때 김영숙은 국방위 과장으로 수행했다. 한 연회에서 북한 측 인사들이 중국 측 인사들에게 이 분은 과장이자 부인이라며 특별히 인사를 시키기도 했다. 

김정일은 1973년 김영숙과 결혼했고, 다음 해 김설송을 낳았다. 김설송을 만나본 사람들은 그녀가 북한의 다른 일반여성과는 달랐다고 말한다. 머리를 매우 많이 길렀다. 아버지 김정일은 긴 머리는 북한의 전통미에 부합하지 않고, 외국자본주의의 나쁜 관습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자신의 딸 머리카락 단속에 있어서는 거의 방법이 없었다. 김설송의 키는 165센티미터로 김정일보다 컸다. 얼굴형은 갸름하고 큰 눈에 생기가 돌았고, 우아한 품격과 쾌활한 성격으로 어렸을 때부터 김정일이 애지중지했다. 그녀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점잖고 예의 발랐으며, 특정장소에서 공개적으로 나선 적이 없다. 늘 아버지 뒤에서 멀찌감치 따르거나 종종 손에 든 작은 가방에서 아버지의 안경집과 전용 컵을 꺼내 아버지가 필요할 때 사용하도록 도왔다. 많은 사람들은 줄곧 그녀가 김정일의 수행간호사이거나 여성 수행경호원으로 생각했지만 나중에 김정일의 딸임이 확인됐다. 

김설송은 김일성종합대학의 경제학계열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이후 당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로 보내져 문학 분야의 업무를 맡았다. 선전선동부에 올라온 문학작품 가운데 김정일 서명이 있는 것은 모두 김설송이 대신 한 것이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예술에 대한 이해력이 높고 감성이 풍부하며 문학적 소양이 도드라졌다. 1990년대 말부터는 김정일의 경호업무와 일정관리업무를 총괄하기 시작했다. 김정일이 현장지도 혹은 군대시찰 등의 활동 시에 그녀가 모두 수행했다. 아울러 신변안전의 보호와 일정준비 등 분야의 최종적인 검사와 관리업무도 책임졌다. 

김설송이 김정일의 외부행사를 따라갈 때에는 인민군 복장에다 중령의 견장을 달았다. 한 번은 김정일이 공장 현장지도를 나갔는데 그가 공장 간부들과 악수를 하고 나서 몸을 돌리자마자 김설송이 차에서 내려 이미 소독된 손수건으로 김정일의 손을 닦을 수 있도록 했다. 김정일이 2002년 8월 러시아 극동지역을 방문했을 때도 김설송이 따라갔다. 김정일 총서기는 여러 차례 이와 같이 말했다.

“나는 설송을 유달리 좋아하는데, 그녀는 두뇌가 좋고 능력이 있으며 나를 아주 많이 닮았다.”

출처: 江迅,『朝鲜是个谜』,(홍콩:明报출판사,2012년 6월),pp.304-306. (2015년  1월 에쎄에서 번역출판 됨, 북한이라는 수수께끼, 에쎄(글항아리)

2013. 6. 28. 00:20

한중정상회담 첫째 날이 지나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대외정책에서 한미 간 한중 간 관계에 대한 공조를 강화하면서 외교분야에 합격점을 받는 정도의 인상으로 임기 5년을 보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리고 한반도에 크고 작은 위기가 닥칠 때마다 이 모든 것을 북한의 탓으로만 돌리면서 미국이나 중국에 매달리며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을 공산이 크다. 


이를 통해 양대 강대국에 의해 북핵문제가 적절하게 통제될 수 있다면 박근혜 정부는 대내적으로 외교분야에서 최대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대국민홍보의 과실을 따낼 것이다. 아울러 제 한반도문제에 남북관계의 교착에 대한 1차적 책임은 모두 북한이 지게 되는 효과까지 거둘 것이다. 그 이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 내 많은 대중, 특히 지난 대선 야권을 지지했던 많은 지지자 역시 남북관계에는 매우 보수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겉으로는 계속 남북 간의 대화를 해야 한다고 큰소리를 칠 가능성이 높지만, 진정성을 가질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남북 간 대화에서의 진정성은 이미 지난 남북대화 결렬에서 어느 정도 읽히기 때문이다. 진정 개성공단 재개와 남북관계 개선 등으로 한반도 안정과 평화를 생각했다면 아마 회담 직급의 문제로 회담개최 결렬을 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북한과의 대화의 가능성은 열어놓되 '북한에 할 소리는 한다.'는 기조를 5년 내내 그대로 가져갈 것으로 보인다. 이는 또한 지난 이명박 정부에서의 단순 무식한 외교전략에서 학습된 것이기도 하다. 지난 정부가 워낙에 대북정책에서 많은 것을 망가뜨렸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박근혜정부의 외교전략이 돋보이게 보이는 환각작용이 일어나는 것인데 지금 임기 초반의 외교정책(물론 박근혜 정부가 애초에 이런 것을 의도했던 것은 아니겠지만)은 표면적으로는 북핵의 안정적 관리와 많은 야권 지지자들의 지지까지 한몸에 받으며 유지될 것이다. 


문제는 북한이 그저 이런 상황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으리라는 것과 미중과 일본 역시 손만 놓고 이 상황을 넋 놓고 바라보지는 않을 것이라는 데 있다. 앞으로 북핵문제가 교착될수록 한반도의 위기감은 더 커질 테지만, 오히려 한국 내 여론의 향방은 위기감의 근원은 그저 북한이라는 적이 있기 때문이라는 인식이 재확산되고 고착화될 것이다. 국제정치에서 '영원한 적과 동지도 없다'는 표현은 거의 진리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진다. 나는 흔히 말하는 종북주의자도 아니지만, 적이라 생각되는 북한도 친구가 될 수 있고, 친구라 생각되는 미국이나 중국, 일본도 언제든 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정학적으로 한반도라는 공간에 사는 한국이라는 국가는 강대국 간의 경쟁이 서로 첨예하고 부딪치는 이 현실에서 벗어날 길은 오직 새로운 인식을 통한 평화구축방안을 구성해 나가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 정부가 강대국에 줄기차게 인정받기를 바라는 한반도신뢰프로세스나 동북아평화협력구상이 그저 구호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면, 이 구상을 적극 실현하고 구성했으면 바란다. 하지만 그 기대는 차츰 줄어들고 있다.           


오늘 이미 '중국인민의 라오펑요'라는 칭호를 선사 받았는데 내일쯤 중국 대학에서 중국어로 강연하고 난 후 중국에 받는 칭찬은 더욱 늘어날 것이다.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은 경비가 삼엄한 영빈관 댜오위타이에서 마오타이주나 마시면서 지내면 별일이 없겠지만, 어디 베이징 왕징 부근의 KTV 가서 여자 끼고 술 마시다가 걸리는 참모가 나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금주령을 내렸다니까 이번엔 별일 없으리라 생각한다. 중국에 가서 명주 마오타이도 못 마시면 중국음식이 좀 느끼하겠다. 이게 다 윤창중 탓이다.       

2012. 8. 5. 07:56

해외에서 올림픽 시청이 가능한 곳(www.mytimon.com)을 알게 되어, 이러면 안되는데 올림픽 경기를 종종 아주 잘 보고 있다. 오늘도 축구 8강 경기보느라 밤을 새었다는;;; 며칠 전에는 뒤늦게 런던올림픽 개막식을 보게 되었는데, 어느 정도 스토리가 있고 위트가 살아 있는 개막식이었다는 것은 인정한다. 대니보일의 연출력도 가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런던올림픽에 대해서는 굉장히 관대한 평가가 이루어지고, 지난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에 대해서는 중화민족의 부흥이라는 편견에 따라 단순히 시각적이고 규모만 큰 개막식이었다고 폄훼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물론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에 그런 부분이 없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내가 제기하고 싶은 것은 비판을 할거면 동등한 선상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런던올림픽 개막식도 따지고 보면 지난 최강대국에 대한 자부심을 엿볼 수 있었다. 개막식 주제 자체가 '경이로운 영국'아니던가. 스토리텔링이 좋든, 시각화가 좋든 개막식의 연출은 온전히 개최국에 있는 것이고, 시청자들은 물론 그와 관련한 논평을 얼마든지 할 수 있기도 하다. 재미있는 것은 재미있는 것이고, 재미없는 것은 재미없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런데 인터넷을 살펴 보다 보면, 이 런던올림픽 개막식을 둘러싸고 좌우파 진영 모두 아전인수격인 해석을 내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보수당에서 중국보다 더 좌파적인 개막식이었다고 혹평하였지만, 아동복지에 대해 언급하고 좌파적인 개막식과 좌파적 그룹의 공연이 있다고 해서 마냥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도 모순이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것은 개막식의 일부였을 뿐이고, 개막식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영국이 산업사회의 시발점이 된 곳이라는 것과 산업화가 세계를 변화시켰다는 것이었다. 일부 그 산업화에 따른 현대 영국사회의 폐단을 드러내는 부분도 있었지만, 사실 그보다는 과거 대영제국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잃어버린 영화에 대한 그리움이 더 강했던 개막식 모습이었다. 


개막식에서 각 국가 선수단의 입장 당시 함성소리를 자세히 들어본 사람이 있던가. 한국을 비롯한 영미 유럽세계에 익숙하지 않은 제3세계 국가들이 등장할 때는 응원의 소리는 거의 듣지를 못했다. 역으로 영국령이었던 국가들이나 영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강대국들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더 환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유일하게 부상하고 있는 중국선수단이 입장할 때만 이례적으로 환호성이 상당히 컸다. 


대중문화라는 것은 굉장히 무서운 것이다. 비틀즈의 음악을 듣고 자라나고, 영국 아동문학의 영향을 받은 세계인들은 그 안에 감춰진 영국문화에 대한 우월감은 읽지 않고,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아마 역으로 베이징올림픽도 그랬을 것이다. 서구인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이질적이지만 매력적인 개막식이었을 것이다. 다만 한국이나 일본 등의 입장에서 오히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만큼 중국의 부상이 막연히 두려웠던 것일테고, 영국의 모습은 그저 대중문화의 익숙함에 가려 그 저변에 깔린 함의를 읽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대니보일의 연출력이나 장이머우의 연출력 가운데 누가 더 나았던가 평가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저 각자 자신의 국가에서 열리는 축제에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념은 한 국가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던 개막식이었다.   




2012. 5. 16. 20:18

 

출처: http://www.21ccom.net/articles/zgyj/gqmq/2012/0428/58663.html

2011. 9. 6. 14:37
한국에서는 연일 안철수 교수와 관련된 뉴스가 일파만파 보도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 이것과 관련해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마땅치 않으므로 뭐라 딱 집어 언급하기 힘들지만, 이것에 대해 몇 가닥 생각은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처음에는 내가 가지고 있던 편견과 이념의 틀 속에서 그의 정체성에 대해 잠시 혼동이 왔었다. 이것은 윤여준과 관련되었다는 것에서 연유된 것인데, 오마이뉴스와의 단독 인터뷰로 정리가 되었다. 난 일단 전적으로 그의 정치권 진입은 환영하는 편이다. 다만 그의 정치권 진입을 둘러 싼 몇몇 논쟁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다.

1. 정치와 행정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에 대한 그의 자격 여부
그가 말한 것처럼 행정조직은 아니지만, 일단 조직을 운영해 본 그의 경험을 인정한다. 그리고 정치권 검증에 대한 이야기들에 깊은 반감을 표하고 싶다. 물론 상식적인 차원의 검증, 즉 정치가로서의 도덕성과 정무와 행정조율 능력에 대한 검증은 필수적이다. 다만 늘 거슬리는 것은 기존 정치권의 검증 어쩌구 저쩌구 하는 소리들이 기득권을 가진 정치세력들의 쓸데없는 소리라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처음부터 정치가로 태어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검증 여부는 일단 들어온 이후 상식적인 차원에서 검증하면 그 뿐이라 생각한다.

2. 명성과 정치에 대해
일단 그는 젊은 층에서 인기가 높다. 하지만 이는 마땅히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기존의 명성 만으로 성공적으로 정치권에 진입하고, 인기만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 바로 현재 대한민국 사회를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경제를 잘할 것 같아서 뽑았다가, 이제는 깨끗한 사람을 선택하고 싶다는 열망이 강하다. 하지만 이미지에 의해서만 그리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여겨진다. 어느 외부의 한 사람이 정치권에 진입했을 시 그가 걸어온 길에 대한 투명한 검증과 아울러 그가 앞으로 걸어갈 길에 대한 비전을 봐야 한다. 그리고 그가 언급한 것처럼 얼마나 이 사회를 위해 헌신할 수 있겠는가만 보면 되지 않겠는가.

3. 무소속
그가 서울시장이나 혹은 대통령 경선에 나간다고 해도 혼자서 정치나 행정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를 도울 조직이 필요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 조직을 만들어 나가고 연대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민주당으로 가는 것도 난 반대다. 아울러 민노당이나 진보신당으로의 진입도 어려울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기존 정치에 대한 환멸로 인한 한국 사회의 정치적 무당파의 비율만 봐도 어떤 변화가 요구된다는 것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서울시장 출마 시 큰 틀에 있어서 야권연대 정도가 적당할 것으로 보인다.

4. 또 다른 강남좌파가 아니냐에 대한 의문
사실 그가 걸어온 길은 평탄한 길이었음은 맞는 말이다. 의사로서, CEO로서, 대학교수로서, 대학원장으로서 그는 한국사회의 주류로서의 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듯 그는 그 안에서도 끝없이 도전해 왔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에게는 열정이 가장 큰 무기이다. 가난하고 힘들게 살았다고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할 것이란 장담을 할 수 없고, 보다 안락한 길을 걸어왔다고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하지 못할 것이란 장담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여튼 그의 신선한 등장에는 반가움을 표시하고 싶다. 다만 그가 기존의 정치권에 편입되어 들어가면서 쉽사리 변질 된다면 또 역시 많은 아쉬움과 분노를 느끼게 될 것이다. 적어도 그 어떤 최소한의 가치를 지켜 나간다면 현재의 '주시'에서 아낌없는 '지지'를 표할 것이다. 그의 앞날에 건승을 빈다.   
2010. 4. 21. 00:49
1. 광화문 글판
 
광화문 주위에 서식하던 4년여간 소소한 즐거움 가운데 하나가 계절이 바뀔때마다,  교보빌딩에 내걸리는 글판을 보는 것이었다. 광화문 네거리의 신호등을 건너는 때면 으례 목도하게 되는데 봄과 가을의 글판들이 특히 좋았다. 그 글판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나 시심이 들기 마련이며, 언제나 시인이 되고 싶다는 순수한 욕망에 불을 지피고는 했다.

올해 봄의 글판은 서울에 있지 않은 관계로 채 보지 못했는데, 이웃의 블로그에 가니 떡 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내내 마음이 어두웠는데 그 포스트를 통해 다소간의 위안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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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와 글판관련 소개 기사:
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0022800090343570&outlink=1
 
장석남 - 그리운 시냇가

내가 반 웃고
당신이 반 웃고
아기 낳으면
돌멩이 같은 아기 낳으면
그 돌멩이 꽃처럼 피어
깊고 아득한 골짜기로 올라가리라
아무도 그 곳까지 이르진 못하리라
가끔 시냇물에 붉은 꽃이 섞여내려
마을을 환히 적시리라
사람들, 한잠도 자지 못하리



2. 김예슬 선언

김예슬에 대해 오프라인에서는 화제로 삼은 바 있지만, 블로그에서는 입장을 표명한 적 없다. 의견을 피력하기에는 내 세속적 삶이 부끄러웠다. 며칠 전, 선언과 관련하여 김예슬 학생이 책을 냈다고 한다. 전후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이 점만큼은 탐탁치 않다.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할지라도 '그녀의 선언'에 어울릴만한 후속행보는 아니었다. 책을 내야 했다면 어느 정도 시점이 흐른 뒤, 자신이 대학에 몸담지 않고도 얼마나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알려주는 그런 것이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향후 그 책의 수입 대부분이 공익에 쓰여진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문제가 된다.

그녀의 선언은 선언만으로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 글이 또다른 글로 이어질 때, 대체로 가식이 된다고 나는 믿는다. 현재 이 사회 대다수의 지식인들이 그러하다. 이론과 실천이 중요한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녀의 출판의도가 내가 가졌던 생각과 상반된 것이었으면 좋겠다.



3. 두 번째 짤방

엊그제 아이스쇼에서 꽃혔던 핀란드의 키이라 코르피가 시구를 했단다. 북유럽은 역시 명불허전이다. -.- 늙어가는 노총각의 춘심이라 생각하고 양해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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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8. 6.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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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마땅한 대책도 없이(연출: 구태환)'
- 노동자와 서민에게서 일을 빼앗는 것은 지뢰밭길을 걸어가라는 것. -


대학로에서 오늘부터 시작한 연극이다. 택규형의 도움으로 초대권을 받아 컬처클럽 몇몇 귀여운 일원들과 관람하게 되었다. 초대를 받았다 하더라도 연극의 질이 적당히 유지가 되지 않았다면 관람후기같은 것은 쓰지 않았을테지만 이건 뭐 너무나도 시의성이 짙은 극이었다. 극의 전반부는 마치 최근 "쌍용차 사태"에서 위기에 몰린 정리해고 노동자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듯 했다. 아내와 딸을 둔 강만석과 김정만은  공장 노동자인데(계약직인지 파견노동자인지는 확실치 않다.) 회사의 구조조정과 파업 등으로 인해 대기발령이라는 허울 뿐인 정리해고를 당한다. 당장 밥벌이가 곤궁해진 그들은 가족들을 위해 또는 자신을 위해 일자리를 찾아 전국을 떠돌게 된다. 하다못해 극심한 추위를 무릅쓰고 민통선에 몰래 들어가 지뢰를 밟을 수 있는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나무를 불법 벌목하는 일에까지 방글라데시에서 온 외국인노동자와 함께 가담한다. 그러나 그것도 여의치 않게 되자 결국 대한민국 공단의 심장 울산까지 떠밀려 오게 된다.


그곳에서 다시 우연치 않게 조우하게 된 극렬노동운동가인 후배노동자 봉기. 서글픈 재회를 자축하기 위해 그들은 한 막걸리집에서 밤새워 술을 마시게 된다. 가진 건 '기술'하나 뿐인 만석의 노동력은 막걸리집 노파의 수리 요청에 다시금 빛나게 된다. 결코 별 볼일 없는 그의 기술을 높이 산 막걸리집 주인 할머니는 기꺼이 수리비를 지불하고 그들을 술집 방 하나를 내준다. 이어지는 술자리에서 서울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미 노정된 사회의 구조적 문제점을 예리하게(?) 파고 드는 버릇을 가지고 있는 봉기가 만석과 정만에게 폭설로 무너진 하우스를 고치면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며 그들에게 희망을 제시하였다. 그들은 그 장밋빛 계획에 취해 모처럼 달콤한 잠에 빠지게 된다. 다음날, 집을 떠날 때 아내가 챙겨 준 만석의 비상금까지 믿었던 봉기가 가지고 자취를 감추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만석에게는 산타 할아버지의 휴대폰 번호를 아냐고 물어보며 말했던 딸내미의 소원 하나가 스쳐 지나간다. "내 소원은 아빠와 함께 집에서 사는 것이야."


황지우 시인이 "삶이란 어느 정도의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고 했던가. 이 연극 속에서 몇 차례  언급되었던 '행복'과 "18"이라는 욕설. 노동자와 서민에게 있어 현대사회는 도처에 묻혀 있는 지뢰밭길을 건너가는 것과 같다. 다행히 지뢰를 밟지 않게 된다면 적어도 행복은 꿈꿀 수 있는 권리 정도야 누릴 수 있지만 그러나 그럴 확률은 지극히 낮기에 결국 언제나 되뇌이는 것은 '씨팔'뿐이다. 역시 어떤 관점에서는 그 정도에서라도 끝날 수 있는 것도 그들에게는 다행일 따름이다.  


극중 초반에 등장하는 '고용안정센터'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는 여전히 한국사회가 얼마나 고용이 불안정하고 그 속에 많은 모순들을 내포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타인들의 무관심과 방관. 늘 하는 생각이지만 일자리를 빼앗기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타인들의 어정쩡함과 무지일지도 모르겠다. 점차 나아질 것이다라는 희망어림도,  파이를 키워야 우리 모두가 잘 살 수 있다라는 사탕발림도 모두 거짓일 뿐이란 생각이 강해진다. 그들은 정작 사태를 개선할 의지도 또한 파이를 키울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시의적절하여 관심깊게 보았고, 또 배우들의 연기도 꽤 괜찮았지만 좀 무딘 결말과 현장의 느낌이 제대로 살지 않는 등 디테일한 부분에서 아쉬움을 느낀다. 그래도 적지 않은 대중들이 그들의 연기와 극을 사랑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쌍용차 정리해고 대상자 974명의 투쟁이 헛되이 되지 않기를, 아울러 도장공장에 대한 공권력 투입에 강력히 반대합니다."
2009. 5. 14. 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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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머리도 식힐 겸 해서 7급 공무원을 간단하게 보고, 바로 이어 박쥐를 봤습니다. 좀 늦게 끝난데다 화장실 들렀다 가느라 한 7분 가량 처음을 보지 못해서 좀 아쉬웠는데요. 11시 무렵에 극장에서 나왔는데 그 잔영이 아직도 남아 있네요. 영화는 각자가 해석하기 나름이기도 하지만, 박찬욱은 어떤 의도를 가졌던 것이었을까란 생각을 해봤습니다. 어쩌면 간략한 영화평이 될 수도 있겠네요.

전 이 영화가 쾌락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신념'따위는 내던질 수 있는 인간 군상의 추잡한 모습을 그렸던 것은 아닐까란 생각을 했습니다. 영화에서 신념이란 것은 신앙으로 치환이 되고 있지만, 신념이나 신앙, 그리고 작게는 각 개인의 소박한 믿음까지 이 모든 것을 포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영화 속의 캐릭터들이 대체로 불편하게 다가오는 것이 박찬욱 영화의 특성이겠지만, 전 이것이 일탈하지 않은 인간들의 모습도 크게 다를 것이라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곱게 포장되어 있다고 할까. 결국 일상에서 다소 벗어난 인물들을 통해 정상사회의 인간들을 겨냥한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듭니다.


환언하여, 살아온 배경이 달랐던 신부 상현(송강호 분)은 기존의 신앙자였다는 굴레에서 끝까지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저는 이제 모든 쾌락을 갈구합니다."란 대사로 철저히 자신의 행동이 모순임을 극적으로 반증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고, 반대로 "이 지옥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나가고 싶어서요."란 대사를 날렸던 태주(김옥빈 분)는 송강호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뱀파이어로 환생하면서부터는 좀 더 적극적인 형태의 행위를 추구합니다. 어찌 보면 송강호는 포장된 형태, 김옥빈은 날 것 그대로의 형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의 최후는 태주의 폭주를 견디다 못한 상현에 의해 제어되면서 한줌 재로 산화하게 되지요. 이 라스트 씬 역시 '신념'에 대한 이중적인 관점을 교차시켜주는 듯 했습니다.

한편 조연들을 간단히 살펴보면 상현의 비밀을 공유했던 상현의 시각장애 스승 노신부(박인환)는 사실을 알게 되고, 처음에는 자신의 손목을 그어 피를 내주는 등 희생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하나, 결국 뱀파이어의 힘을 빌어 시각장애에서 벗어나 밝은 세상을 보려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란 것을 보여주게 됩니다. 그리고 상현에게 간접적인 살인(?)을 당하고 말지요.

상현의 친구이자 태주의 남편으로 나오는 강우(신하균)는 뱀파이어로 변한 이들의 폭주 속에서 이들의 정신을 혼란시키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두 주인공의 쾌락 사이에서도 끼어 들면서 이들에게 원죄라는 굴레를 씌우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매주 수요일마다 강우의 집에서 강우의 엄마 라여사(김해숙 분)와 함께 마작을 하며 어울리는 오아시스 멤버(오달수 분, 송영창 분)는 강우의 죽음이 상현과 태주에 의한 것이란 것을 침묵의 라여사를 통해 알게 되면서 바로 태주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죠. 이들이 영화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 역시 무시할 수 없을 듯 싶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끝까지 이들 뱀파이어 커플을 따라 다니는(?) 라여사의 존재. 침묵하는 타인을 의미하는 듯 했습니다. 아들의 죽음이 이들에게서 비롯된 것을 알면서도 또 움직일 수 있으면서도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침묵합니다. 뱀파이어 커플의 최종을 지켜보는 라여사 역시 영화를 관통합니다.

마지막에는 상현이 밤에 뛰쳐나와 거리를 헤매곤 하던 태주에게 처음 신겨줬던 상현의 신발만이 산화한 재 속에서 남겨집니다. 이 신발의 의미도 생각해 본다면 영화에 좀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잔인한 장면에 대박흥행은 하지 못할 것 같지만, 7급공무원을 보면서 '하하하'하면서 아무 생각없이 보는 영화도 필요한 법이지만, "이 영화 뭐가 이러냐." 하면서 짜증내며 영화가 던져주는 화두에 대한 생각을 서둘러 갈무리하는 것도 피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영화란 결국 삶을 투영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중적인 영화나 매니아적인 영화나 결국 궁극적인 귀결은 유사할 것입니다.  

2009. 3. 27. 14:11

지난 일요일 어머니를 서울역에 모셔다 주고 돌아오는 길에  아무 것도 볼거리가 없어 한겨레21의 15주년 특별판을 사면서 보게 되었던 표지 관련 기사이다. 온라인에는 다소 늦게 올라와 이제서야 올리게 되었다. 칼 폴라니의 주저 '거대한 변형'에서 주장하는 바와 관련된 인터뷰,  등을 다루면서 이후의 세계를 상상하는 기사도 있어 흥미롭게 읽은 바 있다.  (아래 첫 기사를 비롯하여 위의 굵은 줄로 표시된 것들도 모두 관련 기사로 가는 링크이다.) 이 기사의 상징성은 기존의 하이에크 시대의 종말을 고언하고, 칼 폴라니의 이론을 통해 생태적인 세계의 희망을 표지한 기사라고 하는 데 있다. 흥미롭고 또 그러한 세상에 동조하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글쎄 선뜻 동의할 수는 없다. 나 역시 언제나 연대를 통한 좀 더 밝은 미래를 꿈꾸는 편이지만, 유기적으로 이 세상을 융합할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하는 주류적 이론이 되기에는 현실적으로 갈 길이 멀다는 판단이다. 그럼에도 충분히 읽어볼만한 가치는 있다고 생각하기에 포스팅한다. 5월에 완역된 새로운 책이 나온다는 관심있는 분들은 한 번쯤 사서 보시길 바란다.


시장을 의심하는 당신 떠나라, 폴라니의 세계로 [2009.03.27 제753호]
고3 교실 같은 회사에서 세계 경제를 비관하는 애널리스트와 무덤에서 불려나온 폴라니의 대화
▣ 안수찬 정인환
» 시장을 의심하는 당신 떠나라, 폴라니의 세계로/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세상이 바뀌고 있다. 신자유주의 30년, 자본주의 100년의 기틀이 거대한 전환의 초입에 들어섰다. 인류 문명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창간 15주년을 맞은 <한겨레21>은 정치경제학자 칼 폴라니로부터 해답의 실마리를 찾는다.

우선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와 폴라니의 가상 대화를 꾸몄다. 이어 폴라니의 삶과 사상의 주요 내용을 정리하고, 21세기적 함의를 짚는 좌담도 마련했다. 그와 함께 개척할 우리의 미래도 그려보았다.

이제 시장과 자본은 더 이상 인간이 기댈 것이 못 된다고 당당하게 선언할 때가 왔다.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을 용기 있게 펼칠 때가 왔다. 용기를 갖고 당당하게 말하자면, 칼 폴라니가 새 시대의 출발점이다. 편집자

애널리스트: 출근하면 회의실부터 가요. 갈색 원탁이 있고 붉은 의자가 있고 백색 칠판이 있어요. 아침 7시면 회의가 시작돼요. 그전에 담배부터 피워요. 단 몇 초나마 우울과 긴장을 눅이지요. 공식적으로야 서울 여의도 모든 건물은 금연 빌딩이에요. 그래도 담배마저 못 피우게 하면 사달이 날 거예요. 스트레스가 워낙 많거든요. 애꿎은 청소부 아줌마만 꽁초 치우느라 욕을 봐요.

돌아와 자리에 앉으면 책상 위에 컴퓨터 모니터 두 대가 있어요. 하나로는 지난밤 미국 증시를 살피고, 다른 하나로는 뉴스를 봐요. 비관과 낙관 사이를 자맥질하죠. 최근에 눈여겨봐둔 기사들이 있어요. “앵글로색슨 자본주의 체제 전체가 의문시되고 있다.” 2008년 10월 <뉴스위크> 기사예요. “서구식 자본주의 모델이 실패했다.” 격월간지 <포린어페어스> 2009년 1·2월호죠. 국제통화기금(IMF)은 3월6일 정책보고서에서 “시장만능주의의 가정이 실패했다”고 했어요. “앞으로는 과거 30년과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될 것이다.” 3월9일 <파이낸셜타임스> 보도죠. “자유방임주의 시대는 끝났다.” 3월16일 <가디언>에 실린 브라운 영국 총리 인터뷰예요.

저는 예전과 다름없이 매주 보고서를 내요. 불길한 예감은 절대로 실현될 리 없다고 꽁꽁 힘주어 스스로를 속이면서 말이죠. 그런 기사들 가운데 당신을 만났어요. 1년 전이었지요. 지난해 3월 <뉴욕타임스>에 브래드퍼드 드롱 버클리대 교수의 경제 칼럼이 실렸어요. 그 칼럼에 이런 문장이 있었어요. “폴라니의 말처럼, 시장은 인간의 교류와 대화와 상호 의존이라는 오래된 토대에 기초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토대는 이미 충분히 힘든 시간을 보냈다. 신자유주의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

사람들은 시장의 종말을 말하기 시작했어요. 몇몇은 당신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어요. 제가 발 딛고선 이 땅, 금융자본주의의 붕괴를 경고했다는 칼 폴라니, 당신은 도대체 누구죠?

폴라니: 나는 한국 신문 이야기를 하지. 2008년 10월 <한국일보> 논설위원이 ‘악마의 맷돌’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어. “시장경제의 재앙은 경제를 다시 사회적 통제 안에 가두어둠으로써만 피할 수 있다고 칼 폴라니는 보았다.” 경제평론가 정태인이 2008년 12월 <경향신문>에 ‘대전환’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지. “케인스와 하이에크가 차례로 30년간을 지배했고 이제는 폴라니의 시대다.” <중앙일보>는 2008년 9~10월에 세 차례에 걸쳐 나를 인용하는 칼럼을 실었어.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윤영관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등이 내 개념과 분석을 빌려 “월스트리트의 붕괴” “시장만능의 신화”를 비판했어. 2009년 2월 <한겨레> 시민포럼에서 우석훈 연세대 강사는 “이제 폴라니의 시대가 온다”고 발표했어.

2000년 이후 2007년까지 ‘칼 폴라니’를 직접 인용한 칼럼은 중앙일간지를 통틀어 두세 건에 불과해. 그런데 2008년 하반기부터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나를 갑자기 들먹이기 시작한 거야. 내 책 <거대한 변형>이 5월에 새로 완역돼 나온다는 이야기도 들었어. 연세대 사회학과에서는 나를 주제로 잡은 공개 연쇄 강좌도 열리고 있다는군. 오히려 내가 물어야지. 1964년에 죽은 나를 무덤에서 되살리는 당신들, 도대체 무슨 일을 겪고 있는 거야?

» 시대별 패러다임과 폴라니의 비판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폴라니는 잊혀진 이름이었어. 나는 케인스·하이에크와 같은 시대를 살았지. 그들은 20세기를 차례로 지배했어. 학계에 그들의 제자가 생겼고, 미국과 영국의 정부가 움직였지. 케인스는 루스벨트에게, 하이에크는 레이건에게 영감을 줬어. 그런 대접, 나는 못 받았어. 유럽에서조차 내 이론은 경제학 커리큘럼에서 곧잘 빠졌지.

70년대 이후 미국 대학에서는 케인스마저 공부하지 않는다지? 미국 유학파가 지배하는 한국 학계에 칼 폴라니가 전혀 알려지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야.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 미국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비미국인’의 10%가 한국인이었어. 결국 한국 경제학자들의 절대다수는 하이에크의 자식들이야. 지금 하이에크 세계의 붕괴 앞에서 그들은 당혹스럽겠지. 그래도 폴라니의 존재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겠지.

마르크스의 <자본론>, 케인스의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하이에크의 <법·입법·자유>에 버금가는 내 주저는 <거대한 변형>이야. 1944년에 처음 출간됐지. 이게 한국에 번역된 게 1991년이야. 일어판을 번역한 것인데 그나마 절판됐다더군. 프랑스에서도 1983년에야 번역됐어. 국제학회인 ‘칼 폴라니 정치경제학회’가 만들어진 것이 1987년이야. 이후 사회학·정치학·인류학 분야에서 나를 인용하는 사람들이 간간이 생겼지. ‘세계체제론’으로 유명한 이매뉴얼 월러스틴도 내 영향을 받았어.

그래, 나는 8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조금씩 부활한 거야. 이유가 있어. 나는 마르크스·케인스·하이에크를 차례로 베어버렸거든. 그들의 이상과 프로그램이 현실에서 차례로 파국을 맞기 전까지는 내 자리가 없었던 거야. ‘경제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관념을 나는 끝까지 부정했어. 반면 마르크스·케인스·하이에크는 정확히 그 지점에서 만나지. 그럼 경제결정론의 칼자루를 누구한테 쥐어줄까? 노동자? 경제관료? 금융자본가? 그런 식의 접근을 나는 반대해. 그들의 후예가 학계를 지배하는 곳에서 나는 경제학자 축에도 못 끼었던 거지.

‘폴라니의 아이들’은 90년대 중반부터 조금씩 자라고 있어. 유럽에서는 내 접근법을 기초로 하는 ‘경제인류학’이 독립 학과로 만들어지고 있어. 미국에서도 기존 경제학과 별개의 ‘사회경제학’을 공부하는 학과를 세우려는 노력이 생겨났지. 결정적인 것은 2006년 의회를 장악한 미국 민주당 내부에서 새로운 세계 경제체제의 대안으로 ‘공정무역’이라는 개념을 끌어온 일이야.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조지프 스티글리츠라는 학자의 영향을 받아 그런 논의가 시작됐다는데, 경제에 ‘공정’의 개념을 들여온 게 바로 나거든. 공정·호혜에 대한 폴라니의 이론이 바야흐로 세계 체제에 접목되는 순간이 시작된 거야. 스티글리츠는 2001년 <거대한 변형> 영문판의 서문도 썼는데, “자기 조정 시장경제(라는 신화)에 특별한 결함이 있다는 폴라니의 생각은 아주 최근에 와서야 토론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했어.

하이에크식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단순해. ‘시장이 당신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러니 시장을 가만 놔둬라.’ 거짓말이야. 오히려 시장은 인간을 옥죄지. 실현되지 않을 장밋빛 미래만 약속하지. 만약 네가 폴라니에 대해 궁금해지고 있다면, 그건 시장주의의 주술을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야. 환영해. 폴라니의 세계에 들어온 것을.

» 2009년 2월17일, 미국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주식 폭락에 절망하는 한 직원이 머리를 감싸고 있다. 사진 REUTERS/ BRENDAN MCDERMID
애널리스트: 우리 사무실은 고3 교실 같아요. 몇 주 뒤면 주요 경제 일간지에 ‘랭킹’이 발표되거든요. 업종별 애널리스트 순위가 매겨져요. 펀드매니저들이 애널리스트들을 평가해요. 인간이라는 상품에 공개적으로 등급을 매기는 거죠. 6개월에 한 번씩 있어요. 피가 말라요. 순위에 따라 연봉이 조정돼요. 공개되는 랭킹은 분야별로 5명 또는 10명인데, 요즘은 주식시장이 좋지 않으니까 10등 안에 못 들면 쫓겨날 각오 해야 돼요.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어요. 흔적이 없어요. 달팽이들처럼 소리도 내지 않고 사라져요. 여의도를 아예 떠나는 것 같아요.

점심 때 밥 먹으면 병신이래요. 제 담당 업종에는 애널리스트가 30여 명 정도 있어요. 그 친구들은 회의 시간에 맞추느라 아침도 못 먹고 시장 분석하느라 점심도 거르겠죠. 대신 저녁에는 펀드매니저를 만나 ‘접대’를 하겠죠. 룸살롱도 가고 골프도 칠 거예요. 저는… 그냥 하루 종일 담배만 피워요. ‘진짜 잘나가는’ 애널리스트는 1년에 2억~3억원씩 벌어요. 그만큼은 아니어도 많은 연봉을 받으려면 랭킹에 들어야죠. 그 랭킹은 펀드매니저가 매기는 거고요.

“ㅇ사 2008년 4분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15.2% 증가했습니다.” “이유가 뭔가.” “4분기가 전통적으로 이 업종 성수기입니다.” “보고서에 그렇게 쓸 건가?” “아닙니다.” “그럼 이유가 뭔가.” “저가 신상품 ‘ㅋ’에 대한 구매가 늘어난 것이 주요 원인인 것으로….” “틀렸어. 경쟁사들도 저가 상품은 내놓았잖아. 이유가 뭔가.” “….” “좀 돌아다녀. 사람들도 만나고. 이유를 알아내란 말이야. 다음, 반도체 부문 브리핑해.”

보세요. 회의 시간만 되면 저래요. 다들 ‘논거’를 대지만 실은 ‘직관’이죠. 솔직히 경제가 끝장나버렸다는 식으로 분석할 수는 없잖아요. 그런 분석을 해서는 ‘랭킹’에 들어갈 수 없어요. 어머니는 종로에서 구멍가게를 하세요. 그렇게 제 뒷바라지를 하셨지요. 빈궁이 어떤 것인지 모르지 않아요. 애널리스트니까 돈 많이 벌겠다고 주변에서 부러워하지만, 그게 다 암세포를 만드는 일이에요. 그동안 번 돈은 홀어머니와 함께 살 집을 마련하고, 올가을로 예정된 결혼 준비를 하느라 다 썼어요. 그래봐야 신접살림 차릴 전세 아파트 값도 남지 않았어요. 어머니가 늙으시면 병원비 부담도 적지 않겠죠. 장래를 계획하는 일이 모두 목돈을 마련하는 일로 연결돼요.

제가 절대로 시장 보고서에 쓰지 않는 이야기가 있어요. 이대로 가면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일어날 거예요. 지금 세계 경제는 벼랑에 몰렸어요. 그냥 가면 빠져 죽을 테니까 일단 핸들은 꺾어야겠지요. 그게 돈을 찍어 뿌리는 거예요. 체제 붕괴 조짐이죠. 뿌린 돈은 결국 인플레를 일으킬 거예요. 그러면 정규직·비정규직, 고액·저액 가리지 않고 모든 급여 생활자는 거리로 나앉을 거예요. 이건 저 혼자 속으로만 생각하는 비밀이에요.

가끔 대학 때 생각이 나요. 미국 유학 다녀온 교수들이 가격을 결정하는 시장 요소에 대해 설명했어요. 그리고 덧붙였지요. “그런데 시장이란 게 사실은 ‘불가지’의 영역이야.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지.” 예측할 수 없는 영역의 법칙을 설파하면서 그 방식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구시렁대는 학문을 제가 공부했던 거죠. 그 교수들도 비밀을 알고 있었을 거예요. 비관을 털어놓을 수 없으니 억지로 낙관했던 거 아닐까요. 그들도 박사 학위 받으려고 미국 교수들을 접대했던 거 아닐까요.

폴라니: 마르크스는 당신의 계급을 저주했겠지. 케인스는 당신 같은 금융분석가를 휘하에 부리려 했을 테고. 하이에크는 당신의 역할을 찬양했지만, 실제로는 그리 행복하지 않지? 당신의 노동이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느낌, 돈을 벌어도 행복하지 않다는 느낌, 이 경쟁에서 언제 밀려날지 두렵다는 느낌…. 인간의 그런 불안과 공포까지도 위로해주는 것이 진짜 경제학이야.

“시장을 사회에 착근시켜라.” 내 이론의 핵심이야. 어떤 경우에도 ‘상품화’시키면 안 될 것이 세 가지 있어. 노동·자연·화폐야. 재화를 교환하는 시장은 필요해. 그렇다 해도 노동·자연·화폐를 시장에서 ‘자유방임’으로 거래하면 곧바로 재앙이 시작되는 거야.

노동은 인간의 다른 이름이야. 인간을 사고판다고? 인간은 상품 가치와 경제적 이익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존재야. 토지를 비롯한 자연은 인간이 생산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시장에서 버려지거나 낭비되면 복구할 수도 없어. 화폐는 구매력의 징표야. 구매력은 개인이 뜻한 대로 늘리고 줄일 수 있는 게 아니지. 오히려 국가 또는 세계 금융 체제에서 ‘생겨나는’ 것이야. 인간·자연을 상품화한 뒤에 화폐까지 사고팔 수 있다는 환상을 심은 게 바로 ‘시장 자유’, 즉 ‘자기 조정 시장’의 결정적 폐해야.

노동·자연·화폐의 상품화로 피해받는 건 인류 문명 전체야. 노동자·농민은 물론 생산기업까지도 ‘자기 조정 시장’이라는 신화의 피해자야. 금융시장에서 화폐가 거래되는 방식 때문에 생산기업은 주기적으로 파산될 수밖에 없어. 그 기업이 만들어내는 재화가 아무리 가치 있는 것이라 해도 말이야. 그러니까 자유시장 경제체제에서는 일하는 사람, 기업하는 사람 모두 항상적인 빈곤과 불안에 시달리는 거지.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내버려만 두면 인류의 자유가 증대될 것이라는 이야기는 완전히 거짓말이야. 실제로는 그 반대의 일이 거듭되고 있는 거지.

그렇다고 국가의 개입이 해결책인 것은 아니야. 굳이 표현하자면 나는 국가 대신 ‘사회의 개입’을 내세우는 셈이야. 그런 점에서 나는 사회주의나 파시즘을 싫어했지. 시장을 사회로부터 떼내어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를 떼내어 절대화하는 것을 나는 용납할 수 없었어. 두 방식 모두 인간 사회를 황폐화하는 것은 똑같잖아.

원래부터 경제는 인간 사회의 한 부분이야. 마치 정치와 문화가 사회의 한 부분인 것처럼. 그런데 왜 유독 경제만 정치·문화와 달리 사회적 합의 구조에서 예외가 되어야 하지? 경제는 사회 구성원의 소통·도움·합의 등에 의해 얼마든지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어. 요즘 말로는 ‘시민사회’를 생각하면 되겠군. 시민사회에는 노동자, 농민, 생산기업가 등이 모두 포함되지. 이들의 경제 문제를 ‘사회적으로’ 푸는 세 가지 방식이 있어. 공동체·협동조합을 통한 상호부조, 시장을 통한 재화의 교환, 국가를 통한 사회적 서비스 제공 등이야. 이런 요소의 공존이 ‘폴라니의 세계’를 가능케 하는 뼈대지.

» 2008년 9월27일, 미국 의회가 금융기관에 대해 7천억달러의 구제금융을 집행하기로 한 결정에 반대하는 시위대들이 뉴욕 타임스 스퀘어에 모여 집회를 벌이고 있다. 사진 REUTERS/ SHANNON STAPLETON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매일 여의도 금융가에 쏟아지는 수많은 분석과 지혜의 다만 일부라도 다양한 사회 요소의 공존과 소통을 위해 할애한다면 어떨까? 아침 6시에 일어나 밤 10시에 퇴근하는 당신의 노동 가운데 일부를 공존·호혜의 질서를 만드는 데 쓴다면 어떨까?

애널리스트: 학창 시절, 대학 교지 편집실에 있었어요. 편집장까지 했지요. 마르크스를 공부했어요. 군대 갔다와서 복학하니까 소비에트는 붕괴했고 마르크스의 시대도 끝나고 있었어요. 편리한 머리들이 잊어버려서 그렇지 그런 시절이 있었어요. 고시 공부를 시작했어요. 재경부 공무원이 되고 싶었죠. 국가권력을 빌려 부자들의 돈을 거둬들이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그 돈을 쓰고 싶었어요.

수업 시간엔 하이에크를 배웠지만 마음으로는 케인스가 되길 꿈꿨어요. 하이에크는 자유경쟁을 믿었고, 케인스는 정부 개입을 믿었죠. 저는 고시에 합격할 거라고 믿었어요. 무성한 플라타너스 사이로 매미가 찌릉찌릉 우는 여름을 세 번 보낸 뒤에 시험 공부를 접었어요. 2001년 중소기업에 취직해 2천만원 정도 받았어요. 대기업으로 옮겨 그 두 배를 받았죠. 3년 전 증권사로 옮기면서 다시 몸값을 높였어요.

사무실 입구에는 백색 칠판이 있어요. 이름을 적고 시간을 적고 목적지를 적어요. 서로 경쟁을 시키는 거죠. 기업에 찾아가 정보를 구하는 일을 ‘탐방’이라고 해요. 잘나가는 애널리스트는 ‘탐방’할 일이 많죠. 기관투자가에게 전화 걸어서 시장 정보를 직접 브리핑하는 걸 ‘콜 넣는다’고 해요. 잘나가는 애널리스트는 콜 넣을 일도 많죠. 하루에 50통씩 콜 넣는 사람도 있어요. 저는 회의실 가서 담배를 피워요.

금융이라는 게 원래 돈이 필요한 사람과 돈 있는 사람을 연결해 생산적인 곳에 쓰이게 하는 장치죠. 그런데 돈이 돈을 따먹는 일이 반복됐죠. 미국은 그런 식으로 돈을 벌었고 신흥국은 그들에게 물건을 팔았죠. 모래 위의 집이었어요. 이제 무너지고 있지요. 저도 거기에 한몫했죠. 그래도 펀드 가입한 임금 생활자들에게 좋은 일 한다고 생각하며 지내고 있어요.

여의도에는 집회가 많이 열려요. 저는 그냥 지나쳐요. 달리 뭘 할 수 있겠어요. ‘월드비전’에 기부금을 내요. 진보신당에 가입해 당비도 낼 생각이에요. 지난 10여 년 동안 제 몸의 세포는 모두 바뀌었어요. 마르크스의 것도, 케인스의 것도 아니지요. 365일 가운데 360일을 일하는 사람도 있는데, 저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래도 가끔 옛날 생각이 나요. 플라타너스 그늘 무성한 벤치에 앉아 내 미래와 사회의 미래를 함께 꿈꾸었던 때가 가끔 기억나요. 칼 폴라니, 당신에게 기대를 걸어도 되는 건가요. 그런 세상을 당신이 품고 있는 건가요.

폴라니: 한국의 학자들이 나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는군. “금융경제는 탐욕인데, 폴라니는 탐욕을 경계한다. 최근 금융위기와 관련해 새롭게 조명할 수 있다.”(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시장에 대한 폴라니의 사회적 접근은 다양한 대안에 대해 풍부한 영감을 준다.”(김동춘 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 “민주주의의 심화를 통한 사회경제의 재조직화의 방향을 제시해준다.”(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

이병천 강원대 경제학과 교수는 하이에크주의자들이 판치는 한국 경제학계에서 여러모로 독보적인 학자야. 스스로를 ‘급진적 제도주의 경제학자’라고 부르지. 이 교수는 “폴라니를 새로 읽는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어. △성장에 대한 강박을 떨쳐냈다는 점에서 시장주의는 물론 케인스주의,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와 구분된다 △삶의 기본 터전을 파괴하는 시장주의를 비판하면서 협동조합 등 공동체적 연대규범에 주목한다 △산업과 국가를 거부하는 무정부 생태주의와는 달리 돌봄·협력·소통의 질서를 국가·세계 체제 차원으로 확대한다 △시장을 폐기하지 않고 ‘살림살이 경제’와 ‘시장경제’의 공존을 주장한다 등으로 폴라니 사상의 핵심을 설명했어.

한국 사람들은 폴라니를 몰랐지만, 실은 폴라니적인 일을 꽤 벌여놓았어. 노동운동은 모든 협동조합의 기초야. 영농조합이나 중소기업중앙회 같은 것은 생산자 조합으로 발전할 수 있지. 환경운동은 생태적 가치를 확산시켜왔지. 생태 공동체를 만들겠다고 귀농한 사람들도 있잖아. 공동육아나 생협도 ‘살림살이 경제’의 기초가 되지. 희망제작소나 아름다운재단에서 펼치는 사회적 기업 운동, 사회 기부 운동도 마찬가지야. 이들을 종횡으로 엮는 풀뿌리 민주주의 운동은 내가 설파한 ‘토론 민주주의’의 출발이야. 진보정당이 그런 일에 주목하기 시작했다며. 창비그룹에서 주창해온 ‘동아시아 공동체’의 이상은 풀뿌리 민주주의와 살림살이 경제를 세계 체제 차원으로 확대하는 씨앗이 될 수 있어. 심지어는 공동체적 전통을 강조하는 보수주의자와 사회 연대를 중시하는 진보주의자가 새롭게 대화할 수 있는 지평도 마련할 수 있어.

한국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까지 일궈온 ‘좋은 사회’를 위한 작은 성과를 계속 덧대고 엮어내는 일이야. 이제, 질문을 돌려줄게. 너는 그런 일에 나설 준비가 되어 있니? 파국을 두려워하며 당장의 연봉을 올리는 경쟁에 머리를 파묻는 대신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연대에 나설 자신이 있니? 그런 일을 2009년 한국 사회에서 네가 펼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걸어도 좋을까? 그런 세상을 정말 네가 품고 있는 걸까?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2009. 3. 11. 01:57

미국발 금융위기의 여파로 시작된 경기하락은 전세계를 저어하게 만들고 있다. 이것이 헤어날 수 없는 경기침체로 갈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벌어지고 있고, 신자유주의는 일면 폐기처분에 직면해 있는 듯 하다. 이런 상황에 다시 케인즈모델이 주목받고 있기도 하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지금 따지기에는 시기상조라 판단된다. 그러나 모든 것에 대하여 재검토와 신중함을 요구하는 지금, 이런저런 고민도 없이 우회전 깜박이만 켜고 있는 한국의 상황은 심야에 상향등을 켠 채 달리면 맞은 편에서 다가오는 차량과의 사고 위험성이 높아진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점도 무시하면서 자랑스럽게 안전주행을 하고 있노라 부르짖고 있는 형국이다.

한편, 당면한 글로벌 경제 위기에서 중국이 주목받고 있다. (이미 주목받고 있지만은...) 얼마 전 미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대전, 대구, 부산 찍듯 일본, 한국, 중국 찍는 동아시아 순방을 하고 돌아갔다. 일본에게는 해병대원을 괌으로 재배치하는 등의 비용과 주일미군을 위한 상당한 액수의 보조금을 요구했다. 물론 이것은 아시아의 패권자로 귀환하고자 하는 일본의 속마음과 일본을 앞세워 아시아를 통제하고자 하는 미국의 속셈이 서로 찰떡궁합처럼 맞아 떨어진 결과일테다. 이후 한국에 와서는 본격적이지 않지만 북한을 유인할 뜻이 있음을 내비쳤음에도 한미동맹에만 매달리는 정부는 이런 간단한 이치도 모른 채 대통령까지 나서며 호들갑을 떠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날아간 중국과의 관계는 다소 달랐다. 중국이 미국을 위협한다 어쩐다 해도 여전히 외로운 초강대국은 변함없이 미국이며 한반도와 대만, 티벳을 둘러싼 지역안보 문제에 있어 많은 이견을 보이고 있지만, 양자의 관계는 이제 어느 일방의 일방적 요구를 들어준다기보다는 상호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수준으로 올라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제날짜 경향신문의 개번 매코맥 칼럼(호주국립대 명예교수)의 내용에 의하면 2001년~2008년 전 세계 국내총생산에서 미국의 점유율은 31%에서 23%로 급감한 반면, 중국의 점유율은 4%에서 9%로 급성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1조 9,500억달러가 넘는 중국의 외환보유고는 일면 중국의 국제적 위상을 나타내는 듯 하지만 이 가운데 3분의 1은 미국에서 발행한 국채로 운용되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 달러의 평가절하는 결국 중국이 가진 외환의 가치 또한 하락시키고 있는 셈이다. 중국으로서는 자랑스러운 일만도 아닌 고민덩어리를 안고 있는 셈이고, 이런 측면에서 미국이 이를 통한 반사이익을 얻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 중국이 바보도 아닐테다. 중국은 끊임없이 미국의 국채를 사들이고, 미국을 도와주는 모양새를 하면서 살금살금 지속적으로 추진해왔던 다극화 전략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동할 것으로 보인다. 큰 문제없이 미국의 힘을 슬슬 빼는 것, 그리고 언젠가는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잃어버렸던 중화(中華)를 찾고 싶은 마음은 베이징 올림픽의 한 구호인 백 년의 꿈에서도 엿보인다.
 
이렇게 주변 열강들은 달리고 있는데 한국은 엉거주춤 눈치만 살피며 어떤 적극적인 조치를 취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있다. 뜬금없는 동남아 지역과의 획기적인 관계 개선을 할 것이란 사실에서 보듯 외교는 일찌감치 손 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국내정책에 있어서는 잡쉐어링을 한답시고 불쌍한 젊은 세대의 희생만을 담보하려고 한다. 게다가 일사분란하게 돌아가지 않는 상황이 정부의 정책과 뜻에 반하는 세력들 때문에 기인한 것이라 판단하며, '네탓'만을 반복해 남발하고 있다. 이 밖에 거론하고 싶지도 않은 많은 사례들까지 살핀다면 과거 참여정부의 일련의 일관성은 게임도 안되는 현 정치적 일관성은 과연 혀를 내두르며 '니가 짱이여.'란 찬사를 보내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나도 삶에 있어서 일관성이 매우 중요한 가치라고 여기고 살고 있지만은 적어도 주위를 살피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이넘의 일관성은 어째 몇몇 잘났다 시늉하면 그저 박수칠 것이라 생각하는 듯 싶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한국을 가지고 노는 것은 뭐 껌씹는 것보다 쉽지 않겠는가란 생각도 든다.

답답한 시사 얘기는 블로그에서 웬만하면 피하려고 했었다. 그래봐야 스트레스만 늘고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음악으로 많은 부분을 희석시키려는 의도도 어느 정도는 있었던 듯 싶다. 그러나 어쩌면 나 역시 외면하고 싶은 현실이었던 것은 아닐런지. 그럼에도 주둥이로 나불 거리는 인텔리들은 더할나위 없이 싫다. 결국 까고 보면 그네들의 검은 속내가 드러나는 경우도 한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난 역시나 입으로 떠드는 것보다는 최근 주목받기 시작한 생활투쟁이 마음에 든다. 눈 감지 않되 현실을 직시하고 작은 범위 내에서라도 개선하려 하고 실천적인 삶을 살아가는 대중의 형태. 이것만이 개전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이 땅에서 우리가 소중히 가꿔 온 사회가 더 망가지지 않도록 지키는 현실적인 대안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이 또한 현 사회풍조를 감안할 때 지극히 요원하기 짝이 없다.

여러 곳에서 압박감을 받고 있는 어쿠스틱 기타 연습하려고 했는데, 귀가길에 신문 읽다가 이게 뭐하는 짓인지. 이럴 땐 신문 끊고 싶다.             

2009. 1. 13.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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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어디선가 무심코 스쳐 지나갔던 영화 같은데 사막누님의 포스트를 통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런저런 정보들을 찾아보니 최고의 다큐라는 호평에서부터 미네르바 추천작이란 얘기까지 떠돌고 있다. 영화 원제는 독일어로 직역하면 시대정신이라고 한다. 2007년 미국 활동가 다큐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영화로 배포방식은 구글 동영상을 통해 무료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 홈페이지에서 다운받을 수 있으며, 한글자막도 무료로 모두 다운받아 볼 수 있다. 하지만 본인은 애용하는 저가 다운로드 사이트에서 검색하여 자막까지 완비되어 있는 화질 좋은 넘으로 다운받아 두었다. 2007년에 제작된 본편은 모두 1부 - 기독교, 2부-9.11테러, 3부-FRB를 둘러싼 지구를 장악하는 '커튼 뒤의 사람들'로 총2시간여에 걸쳐 이어진다. 이어 2008년에 제작 보급된 부록(ADDENDUM) 역시 본편의 3부를 잇는 내용으로 마찬가지로 2시간에 걸쳐 편성되어 있다.

인터넷의 전체적인 평을 보면 1부  기독교와 관련된 내용은 일찌감치 알 만한 사람들은 아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고 천문학 등의 언급으로 좀 복잡하고 지루한 면이 없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2부 9.11테러 부분은 기존의 영상들을 집대성하여 무난히 볼 수 있다고 한다. 이 다큐의 백미는 무엇보다도 FRB를 위시로 한 자본의 전지구적 장악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3부이다. 그리고 부록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한다.

오늘 밤에 제대로 감상할 예정이라 대략적으로 화면을 넘겨 가며 검토한 수준에 불과하지만, 확인될 수 없는 여러 불편한 진실들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주목을 받는 까닭은 영화를 전체적으로 아우르는 구조와 중간중간 나오는 허를 찌르는 대사(자막)에 있는 듯 싶다. 사막님에 따르면 마지막 엔딩 부분의 자막은 바로 다음과 같다. "사랑의 힘이 힘에 대한 사랑을 이길 때 세상은 평화를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강하고 아름답고 특별하다. 보통의 개인으로서 힘을 갖지 못할 이유가 없다. 혁명은 지금부터다."

멋지지 않은가. MBC다큐 '북극의 눈물'도 아직 다 못 봤는데 새로운 것이 날 괴롭힌다. 할 일도 많은데 사막님을 원망할테다.    

인터넷 위클리경향에서 보다 상세한 영화에 대한 정보가 잘 나와 있으니 관심 있는 분은 읽어보고 위에 기재한 곳에서 다운을 받으시던가, 인터넷 저가 다운로드 사이트에서 받으시던가, 그도 귀찮으면 제 네이트온(ej7753@nate.com)을 통해 달라고 협박하시라. 1.4G분량인데 네이트온을 통해 점검해 본 결과, 회사에서는 모든 파일을 넘겨주는 데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2008. 8. 25. 12:59

어제 수업부터는 마지막에 매주 짧은 몇 문장으로 그네들에게 화두를 던져주고 싶다는 생각에서 일종의 삶에 관한 코멘트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가면서 한 학생과 진로와 살아가는 것에 대해 일방적 이야기를 해주다시피 하곤 헤어졌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잠시 눈을 감았다가 내 의식 속에서 들려온 것은 먹먹함 그 자체였다. 낙관도 비관도 하지 말라 외치기 시작했지만 내가 그네들에게 해주는 말들은 결국 담배연기처럼 한 줌 연기로 날아갈 그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인생 선배로, 또 선생으로도 아무런 현실적 대안을 제시해 줄 수 없는 한계와 해결할 수 없는 모순 탓에 흔히들 '다 사기치는 거지'란 말을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유구무언의 세월이 시작되었고 그것이 언제까지 나를 끝없는 나락으로 몰아갈지 모르겠지만 단 하나의 진실만 살아 있다 한다면 그래도 이 무구유언의 당위성은 여전히 유효하리라 믿는다.   

2008. 8. 25. 12:57

오래 참은 흡연에 대한 욕구는 신체적 허기짐과 다를 바 없는 절실함이라는 것은 경험론적인 이야기이다. 폐부 깊숙이 빨려들어간 담배연기가 온몸에 퍼지면서 의식이 아득해지고 팔다리의 긴장이 풀려나가는 그 아련하고도 아늑한 편안함은 그 간격이 클수록 배가되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욕구는 어떠한가? 상처를 받은 인간은 홀로 있음을 추구하기 마련이지만 이는 잠시 뿐이다.  인간의 허망한 몸사위는 기실 그 상처를 다른 사람을 통해 치유받을 수 있기를 바라는 처절함 그 자체이다. 사람도 역시 담배가 주는 폐해와 같은 작용을 할 때가 많지만 그 아름답지만 아련한 순간순간의 반복을 보기 위해 살고 또 하염없이 살아가게 될 것이다.


담배는 참거나 끊을 수 있는 것이지만 사람은 오래 참거나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다면 더 치열한 삶의 전투를 희열차게 열망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나와 너는 모름지기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 

2008. 8. 25. 12:55

오랜만에 펼친 옛날 앨범...  저우웨이 사진이 튀어나왔다. 

순간 가슴이 튕겨져 나갈 듯 쿵쾅대고 환희와 고통이 함께 밀려온다.

사진 속의 그이는 어찌나 신선했던지. 이렇게도 밝고, 환하고 당당했던가.

예전엔 미처 알아보지 못했지만 바로 이게 저우웨이였다.


그래서 그가 내게 무슨 말을 했든지간에 내 가슴은 아직도 그를 원하는 거다.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듯 그에게 묶여 있는 느낌.

하지만 난 사랑의 노예는 아니다. 때로는 나도 감정에 명확하게 선을 긋는다.

상처와 눈물자국은 남지만 세월이 흐르면 점점 강해지는 법.


오늘은 토요일, 또 망쳤구나. 이 남자와 지내는 거 말고 할 일이 없다.

그에겐 아내가 있다. 멀리 유학 가 있었다.

그와는 가라오케에서 만났는데 어찌나 둘이 비슷했는지 그냥 끌려간 거다.

둘 다 혼자였고 아무 목표도 없었다.


법대 친구가 그랬다.

'우리가 어기는 건 법이 아니라 도덕이라나?'

하지만 도덕이 뭔가. 서로 원하는 두 사람이 같이 있으면 되는 거지.

우리가 함께 할 때... 우리 몸이 하나 될 때면 난 그를 믿게 된다.

뭔가 열심히 하는 그의 의지가 느껴진다.

그와 몸을 섞는 순간 난 완전히 몰입하고

다른 고민을 할 여유도 없다. 그러나 안타까운 건 그에 대한 이 뜨거움도 곧 식을 거라는 사실이다.

지금은 온 몸으로 키스하지만 그 느낌조차 영원하지는 않을 거다.


인간은 결국 혼자이며 죽음을 피할 순 없다. 그래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다툼을 일삼고

코앞에 있는 보물에는 무관심하며 잡을 수 없는 신기루를 쫓는 거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 나도 당신 사랑하지 않아. 하지만 당신이 내 곁에 있는 한... 난 행복해. 이렇게 영원히 네 곁에 있고 싶어."


映畵....여름궁전을 다시 돌려 보다가 여주연 위홍의 독백(일기) 가운데 발췌.


한줄평: 위홍의 심리를 대략적으로나마 이해하는가?

2008. 8. 25. 12:54


앞으로 한동안의 '생활'이 남루할지라도

반짝이는 '삶'을 경작하겠다.

2008. 8. 25.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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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두 가지 프리즘으로 존재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잊혀지는 기억.

어떤 형태로든 굴곡되지 않고 살아남는 기억.

그리고 기억이 정작 무서운 이유는 때로 내 자신을 속이기도 한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든 것을 오롯이 기억한다.

2008. 8. 25. 12:50
나는 당신과 섹스하고 싶어."

"나는 당신을 사랑해."


한국사회에서 전자는 주로 여성들이, 후자는 남성들이 쉽게 할 수 없는 말들이다. 억압받거나 혹은 여타 다른 이유에서라도 쉽게 꺼낼 수 없음은 분명하다.

진보와 보수로 구분할 필요없이 좀 더 감정에 솔직해졌으면 좋겠다.

2008. 8. 25. 12:49

민주(民主)적 소통의 기본은 '합의'이다.

'합의'의 과정을 거치면서 '너'와, '나', '우리'가 공존한다면

개인의 '민주적 관계' 및 사회의 '민주적 관계'는 실현되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 소통의 과정을 야멸차게 무시하고 산다.

극히 어렵지만 달성할 수 없는 일도 아님에 분명함에도 말이다.

민주적 과정에서 '텍스트'보다는 '컨텍스트'가 보다 중요한 것도 이때문이다.

2008. 8. 25. 12:48

잘 모르겠다. 나는 모르는 게 너무 많다.

때문에 내 삶은 희열로 충만하다.

잘 모르겠다. 나는 모르는 게 참 많다.

2008. 8. 25. 12:47


'상처는 공유할 수 없다.'란 말을 곱씹어보고 있는 근래이다.

이 문장처럼 핍진(逼眞)하게 되는 말도 없다.

때문에 모든 상처에 일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듯 싶다.

2008. 8. 25. 12:45
 

이 글은 아래 엮인 글에 대한 재반론이자 뉴스를 접하고 처음 내뱉었던 감정적 배설에 대한 보론의 성격을 가지는 글이다.

 

자유와 평등이 보편적 가치이념으로 자리잡고 있는 이 현실 사회는 인간으로 하여금 때때로 도광양회하는 자세를 요구하는 때가 있다. 위의 글처럼 뻔히 모범답안이 보이는 문제에 있어서는 개인의 소신을 잠시 접어두고 우선 실리를 챙긴 뒤 훗날 자신의 주장을 당당히 외칠 수 있는 외연적 능력을 배양하는 것은 현실주의적인 관점에서는 일면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몇 가지 다른형태의 현실주의적인 관점에서도 이번 사법시험 면접문제의 적절성을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엮인 글에서 정의하고 있는 바와 같이 사법을 직-간접적으로 대행할 새식구를 선발하는 것이 현 대한민국 사법시험의 존재의의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게다가 국가의 공무원을 선발하는 자리에 있어 국가관에 대한 문제가 출제되는 것 역시 틀린 말은 아니다. 이와같이 두 가지 사실을 놓고 보았을 때에는 어제 사법면접시험과 관련된 문제출제는 잘못된 것이라 볼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사법시험의 실시와 국가공무원선발 방법을 국가를 움직이는 하나의 제도라고 보았을 때 몇 가지 현실적 부분에 있어 간과하고 있는 점이 있다.

 

1. 먼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운영하는데 있어 필요한 위와 같은 제도들을 하부구조라고 본다면, 이 하부구조를 움직이는 상부구조는 대한민국의 최고기본법인 <대한민국 헌법>이다.

 

헌법 전문에서는 <기본권 존중주의>에 관해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하였다. 이는 국가의 존립목적이 국민의 기본권 보장에 있음을 밝히고, 기본권이 초국가적 자연권임을 인정한 것이며, 개별적인 법률유보조항을 삭제하여 이를 뒷받침하였다. 제37조 2항은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고 하여 기본권의 제한을 엄격하게 하였다.    

 

그리고 <자유권>에 관해서는 아래와 같이 명시하고 있다.

 

자유권〉 현행 헌법은 구헌법에 비하여 자유권적 기본권을 대폭적으로 신장하여 신체적 자유, 사회적 ·경제적 자유, 정신적 자유, 표현의 자유 등 현대 민주정치에 필수불가결한 자유를 고루 보장하고 있다. 그러나 재산권은 신성불가침()의 것이 아니라 그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써 정하도록 되었으며, 공공필요에 의한 재산권의 제한 ·사용 ·수용에는 법률로 정한 정당한 보상을 하도록 하고 있다. 새로운 자유권을 추가하고 개별적 법률유보를 줄임으로써 보다 완전한 보장을 기하고 있다. 특히, 신체의 자유에 관한 보장이 확대되었고, 적법절차제도를 도입하였으며, 형사피의자의 권리 등을 확장하였다.

 

정치구조에 있어서 하부구조는 상부구조의 영향을 받는다라는 명제가 틀리지 않다면 더군다나 대한민국 헌법이 말 그대로 대한민국 최고기본법이라면 하부구조에서 시행되는 여러제도들은 헌법에 구속되어야 마땅하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번 사법 면접시험 문제들 가운데 사상과 관련된 몇몇 질문들은 국민의 사상의 자유를 명백히 침해한 것이라 볼 수 있고, 또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 등의 헌법 조항을 고려한 질문이라 볼 수도 없는 것이다. 물론 이 부분에 있어서는 여러 법관련 전문가들의 법리적 판단이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지극히 현실적인 부분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 다름없다.

요컨대 대한민국 헌법의 조항을 고려하지 않고 시행되는 여러 사회제도들은 대한민국에 있어서 헌법의 존재의의를 형해화할 위험성이 있다.

 

2. 다음으로 위의 주장을 차치하고라도 국가공무원을 선발하는데 국가관을 묻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라고 한다 했을 때 사법연수원생들이 과연 모두 국가공무원이냐라는 의문이 남는다. 시대는 변하여 사법연수원생 1,000명 시대가 열린 지 몇 해가 되었다. 2005년 통계에 따르면 사법연수원 졸업생의 18%만이 판.검사등의 공직에 남게 되고 나머지 전문인력들은 모두 변호사 개업 혹은 취업의 길을 걸어갔다고 한다. 한편 국가공무원이 되지 않는 인원이 배보다 배꼽이 큰데도 불구하고 연간 보수총액만 320억이 넘는 예산이 여전히 사법연수원생들에게 지급되고 있다는 뉴스가 일찍이 보도된 바 있다. (이러한 문제제기에 따라 국회예산정책처도 이러한 보수지급과 관련된 사항에 대해 시대적 변화에 따라 개정이 필요함을 대법원에 요청하였고 대법원도 이에 원칙적으로 동의를 표시한 바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위의 예산을 법적 절차를 밟는데 있어 여러가지로 생활이 어려운 사람을 위한 소송구조의 기반을 확충시키는데 사용한다면 현행의 30배 이상을 늘릴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비단 굳이 위와같은 현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명백히 현행 사법시험은 일종의 자격시험이다. 공직자에게 요구되는 올바른 국가관이 필요하다면 사법연수원 졸업시 판검사 임용자를 대상으로 면접시험을 실시하는 것이 오히려 효율적인 것이 아닌가 반문하고 싶다. 지난 10년간 단지 1명의 불합격자를 낸 것에 불과할만큼 면접시험이 그 의미를 찾고 있지 못하다면 면접시험을 사법연수원 졸업자들에게서 실시하는 것이 우선순위라 할 수 있다. 그저 현재처럼 3차 면접시험의 효율성 비판에 직면하여 성급하게 내놓은 심층면접제도라는 것은 안그래도 온갖 힘든 수험생활을 거쳐온 사법시험 준비생들에게는 무형의 형벌제도임에 다름없다.  

 

한편 사법연수원생들에게 보수지급과 관련한 부분에 있어 생각을 정리하자면 대부분의 인력들이 변호사 혹은 취업 등의 길을 걸어가는 현실이라 할지라도 사회적 공익을 대표하는 법률전문가로서의 당연한 대접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보수지급과 관련하여 불협화음이 발생한다는 것은 법조인이 과연 작금의 한국사회에 있어서 공익을 위해 얼마만큼 복무하고 있는가 하는 국민들의 냉담함이 반영된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3.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상과 소신의 자유이다. 대한민국 헌법에서 보장되고 있는 바와 같이 국가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하지 않는 한 국민의 사상적 자유는 필수적이다. 간고한 세월을 거쳐 어렵게 올라온 3차 시험에서 면접을 치르게 된 수험생들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질문을 받고 당황했을 것이란 사실은 자명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평소 소신을 나이브하게 굽히지 않았던 수험생에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 원칙을 무시한 면접문제 출제자들에게 그 비판의 화살이 돌아가야 마땅하다.

 

결과적으로 엮인 글(트랙백)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장하는 '전쟁은 살아남았을 때나 가능하다'라는 것에 일면 수긍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또 남는다. (자우림의 샤이닝이라고 할까?) 내가 배운 권력의 속성과 인간사 돌아가는 상황을 다각적으로 바라본다면 초심을 당당히 자신의 힘을 펼칠 수 있을 때까지 간직하고 있는 인간이 과연 몇몇이나 될까라는 생각이 든다. (내 좁디좁은 견해로는 실리를 위해 처음 작은 것에서부터 하나하나씩 양보하다보면 나중에는 당위는 온데간데 없게 되고 결국 보다 큰 것과 아무 거리낌없이 바꾸게 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인듯 싶은데.... 말입니다. -.-)  

 

국방백서에서도 이제는 삭제된 주적이란 개념이 법조인을 뽑는 사법시험에서 다시 등장한다는 것은 아직도 우리 대한민국이 색깔논쟁에 있어서 자유롭지 못함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한국사회에 있어서 좌파니 우파니 하는 개념은 타파해야 할 대상이다. 이제 이 사회에서 필요한 양심은 사실 짐(?)을 가장 적게 지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반백년이 넘도록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색깔논쟁은 이제 집어치우고 먼저 우리 자신의 짐부터 줄이는 일이 개인적.사회적 영역에 있어 선행되어야 한다.

 

기존의 알량한 잣대로 다른 사회에서라면 이미 노벨상을 타고도 남았을 수험생들을 괴롭힐 힘이 있다면 이 나라에 만연한 각종 준비생들의 마음을 다독일 수 있는 여러 제반 조건들에나 신경 써주었으면 고맙기 그지 없겠다.

 

(논쟁을 하자는 것은 아니고 공통된 노력을 통해 진리에 다가서자는 취지에서 글 쓴거니까 혼내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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