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2~23일 경주에서 열린 G20 재무장관 회의에서 미국은 자국의 건재함을 세계만방에 과시했다. ‘IMF 구조 개혁’ ‘시장 결정적 환율제’ ‘경상수지 목표제’ 등 재무장관 회의의 ‘놀라운(?) 성과’들이 세계에 던진 신호는 무엇일까. 미국이 아직 세계경제를 자국의 의도대로 제어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변이 없는 한 11월11~12일 열릴 2010 G20 서울 정상회의 역시 재무장관 회의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은 분명하다. 한국 정부와 언론이 ‘한국이 세계 환율 전쟁을 봉합했다’며 자화자찬 분위기에 흠뻑 빠져든 배후에서 미국이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IMF의 ‘신체포기각서’

G20 재무장관 회의의 가장 큰 성과는, 1945년 창설 이후 미국·유럽이 좌지우지하던 국제통화기금(IMF)의 세력 관계를 신흥 개도국 쪽으로 크게 바꾸어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 회의에 따르면, 2012년까지 신흥 개도국의 IMF 지분을 6% 포인트 이상 올릴 계획이다. 이에 따라 지분 순위에서 세계 6위였던 중국이 3위로, 한국은 18위에서 16위로 성큼 도약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동아시아를 비롯한 전 세계 신흥 개도국에게 ‘공포의 대왕’과도 같았던 IMF의 ‘송곳니’가 드디어 빠지는 것일까.

   
ⓒ시사IN 조남진
미국은 G20에서도 자신들이 아직 세계경제를 자국의 의도대로 제어할 능력이 있음을 내보이려 할 것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1945년 설립된 IMF는 미국의 케르베로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지옥의 수문장인 맹견)로 태어났다. 이는 지금은 물론 가까운 미래에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보인다.

설립 때 IMF의 임무는 미국 달러 중심의 국제 환율 시스템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거의 모든 산업국의 통화가치가 미국 달러를 중심으로 고정되어 있었다(고정 환율제). 각국은 고정된 달러 대비 환율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자국 경제를 운영해야 했다. 이는 경기가 나빠도 정부 지출이나 통화량을 늘릴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예컨대 재정·통화 정책을 완화해서 해당국의 통화가치가 내려가는 경우, IMF가 관리하는 달러 대비 환율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의 ‘정책 자율성’이 박탈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질서 하에서 국제수지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경우, 해당국은 자국의 통화가치를 내려 수출을 촉진하기보다 IMF의 구제금융을 받았다. 그러나 이런 시대는 20년을 채우지 못한다. 무엇보다 1960년대 이후 점차 강력해진 유럽과 일본이 강하게 저항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자리’를 잃은 IMF는 1970년대 후반부터 ‘악질 고리 사채업자’로 전업한다. 외환위기를 당한 나라에 돈을 빌려주면서, ‘IMF 구제금융 조건’(IMF Conditionality)이라는 명칭의 ‘신체포기각서’를 받았다. 한마디로 돈을 빌려주는 대신 해당국 정부의 경제 운영권을 박탈한 것이다. 이를 정당화한 논리는 “방만하게 경제를 운영해 외환위기를 자초한 채무국 정부를 믿을 수 없으며, 채권자로서 무사히 돈을 상환받으려면 건전한 경제 운영을 강제할 수밖에 없다”였다. 그런데 이 ‘건전한 경제 운영’이 문제였다. 재정·통화 긴축으로 복지 지출을 삭감하고, 금리와 부가가치세 따위 간접세를 올려 수요를 바닥냈다. 이는 가뜩이나 침체된 채무국 경제를 더 심각한 곤경으로 몰아넣었다.

세계 금융위기, IMF를 부활시키다

이에 더해 IMF는 1997년 외환위기 당시 한국에는 기업·금융 구조조정과 자본시장 자유화(개방)까지 강제했다. 이는 외국 자본이 한국 기업과 은행의 주식(경영·소유권)을 자유롭게 사고팔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동아시아 금융위기 이전 한국 기업과 은행의 경우 주식 거래가 자유롭지 않았다. 현재 중국처럼. 이는 전략산업 부문의 기업 및 은행이 외국인에게 팔려나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공기업 민영화 역시 같은 의도였다.

이때 IMF의 구실은 사실 미국의 금융자본이 한국으로 들어오는 길을 닦는 것이었다. 덕분에 월스트리트는 한국 등 신흥 경제국의 기업·은행 경영권과 소유권을 사고팔면서 재미를 톡톡히 보았다. 이로써 동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IMF는 ‘미국 정부와 금융자본의 하수인’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다시 곤경에 몰린다. 어떤 나라도 IMF로부터 돈을 빌리려 하지 않았다. 시민들이 악질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리지 않으려는 것과 같다. 예컨대 2003년 IMF는 세계적으로 1050억 달러를 대출했다. 그러나 2007년에는 그 금액이 100억 달러에 그쳤다. 신흥국과 개도국들은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MI) 같은 ‘국가 간 통화 교환 협정’을 통해 지역 내에서 외환 문제를 해결하려 시도했다. 혹은 한국·중국·타이완·일본 같은 수출 강국들은 외환 보유고를 수천억 달러에서 수조 달러 규모로 쌓아 외환 부족에 대비했다. 미국은 이를 환율 조작, 글로벌 불균형(어떤 나라는 거액의 무역수지 흑자, 다른 나라는 거액의 적자를 쌓고 있는 경우)의 원인이라고 손가락질했다. 그러나 미국이 조종해온 IMF야말로 이런 사태의 주범이었던 셈이다.

이 같은 IMF를 되살린 것이 바로 2008년 가을의 세계 금융위기이다. 많은 나라가 국가 부도 위기를 맞으면서 IMF는 다시 떠올랐다. 2009년 4월 런던 G20 정상회의는 ‘IMF 강화’를 주요 이슈로 삼으면서 이 국제기구의 재원을 위기 이전의 2500억 달러에서 7500억 달러로 늘리기로 했다. IMF도 이미지 개선 차원에서인지 최근 ‘자본시장 자유화’ 원칙을 일부 완화한다. 심지어 이번 위기 이후 첫 구제금융을 받은 아이슬란드에는 ‘자본 유출’을 통제하도록 허용한다. 아일린 그레이블 미국 덴버 대학 교수는 1990년대 말 말레이시아의 자본 통제에 ‘퇴행’이며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위협했던 IMF가 이번 위기 이후에는 “(자본 통제도) 지옥에서 온 것은 아니다”라는 등 ‘자본 통제’를 일부 인정하는 태도를 보인 점에 놀란다. 그는 “우리들 할아버지 때의 IMF가 아니다”라면서, IMF가 ‘자본 자유화’에 대한 완고한 신념에서 벗어나 ‘생산적 헷갈림’(productive incoherence)을 겪고 있다고 약간의 기대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속단하기에는 이르다. 이번 공동 합의문만 살펴봐도, IMF는 여전히 미국의 독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다. 예컨대 신흥 개도국의 지분이 6% 포인트 늘어난다 해도 IMF의 기본정책 방향을 바꾸기는 어렵다. IMF에서 결정되는 대다수 주요 사안은 85%의 찬성을 얻어야 하는데, 미국 표가 전체 의결권의 17%에 달하기 때문이다. IMF는 미국이 원하지 않으면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는 조직인 것이다. 이에 따라 찬성 비율을 전체 의결권의 85%에서 70~ 75%로 낮추거나, 찬반 회원국의 수를 의사 결정에 반영하자는 개혁안도 나왔다. 그러나 이번 경주회의의 공동 합의문에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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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방문한 스트라우스 칸 IMF 총재(왼쪽)가 원자바오 중국 국무원 총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더욱이 IMF 수장은 유럽 출신이, 세계은행 수장은 미국 출신이 맡도록 하는 관행이 있다. IMF 수장의 경우 지역이 아니라 능력으로 선출하자는 개혁안이 수차례 제기되었으나, 이 또한 이번 합의문에는 흔적도 없다. 다만 2014년 이후 이사회 구성을 8년마다 재검토하기로 했다고 하나, 이는 그야말로 하나 마나한 약속일 뿐이다.

루카스 멘코프 독일 라이프니츠 대학 교수는 “(IMF 수장은 능력별로 뽑는데), 세계은행의 수장은 미국 출신으로 유지한다면 유럽 처지에선 동의하기 힘들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미국과 유럽이 서로의 탓으로 미루면서 양대 국제 금융기구의 개혁을 거부할 수 있는 명분으로 작용할지 모른다.

이번 합의문에 따르면, IMF 이사 24명 중 유럽 몫을 2명 줄이는 대신 신흥 개도국의 몫은 늘린다. 결국 미국은 유럽의 희생을 딛고, 실세 중 실세인 자국 몫을 지킨 것이다. 이로써 IMF에서 미국의 패권은 한동안 더 유지될 것이다. 더욱이 미국으로서는 ‘중국 등 신흥 개도국의 입장을 IMF에 반영했다’는 생색도 내게 되었다. 이는 동아시아 나라들이 여러 차원에서 기도했던 지역통화 체제(치앙마이 이니셔티브, AMF 등)와 외환위기 방어 차원의 높은 외환 보유고 등을 공격하는 강력한 명분이 될 것이다.

자기 파괴적인 미국의 위안화 절상 요구

IMF 개혁과 함께 이번 회의의 성과로 꼽히는 합의안으로 ‘경상수지 목표제’와 ‘시장결정적 환율제’가 있다. 이는 중국이 위안화 가치를 인위적으로 낮춰 미국에 수출을 많이 하는 바람에 ‘글로벌 불균형’이 발생했다는 ‘중국 책임론’에 근거하고 있다. 중국이 경상수지 흑자 목표를 일정하게 낮추기만 하면, 굳이 환율을 조작할 필요도 없게(시장이 결정하는 환율에 따르게) 될 터이다. 가이트너 미국 재무장관은 경주회의 직전 참가국들에 ‘2015년까지 경상수지 흑자 폭을 GDP의 4% 이내로 제한하자’는 서한을 발송했고, 의장국 한국은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흑자국 일본과 독일은 반대했다. IMF가 중국의 GDP 대비 흑자 폭을 올해 4.7%, 2015년 15%로 추정하는 것을 감안하면 ‘가이트너 제안’은 중국에 대한 도발이었다.

그런데도 이번 경주회의에서 중국이 공동 합의문에 순순히 서명한 까닭은 무엇일까. 일각에서 주장하듯이 IMF 지분을 높여준다는 데 혹한 것일까? 이보다는 공동 합의문이 ‘가이트너 제안’과 달리 매우 추상적이라는 데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합의문에는 2015년이라는 기한과 4%라는 구체적인 수치가 없다. 다만 이후 G20이 합의할 “예시적인 가이드라인(indicative guidelines)에 따라 큰 폭의 불균형이 지속된다고 평가될 경우” 경상수지 목표제를 실시한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이 가이드라인 작성에까지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 ‘시장결정적(market-determined)인 환율제’라는 것도 강한 표현이나 추상적이기는 마찬가지다.

더욱이 미·중 양국은 위의 두 제도가 현실화되는 경우 함께 곤경에 빠질 가능성이 있고, 이런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다. 사실 지난 10여 년 동안 중국의 거대 흑자와 낮은 위안화 가치는 양국 경제 번영의 인프라였다. 예컨대 중국은 자국의 싼 노동력을 이용해 만든 저가 제품을 미국에 팔아 엄청난 경상수지 흑자를 거두었다. 중국 외환당국은 수출 능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 달러 표시 흑자를 대규모로 매입해 외환 보유고를 쌓는 동시에 위안화 가치를 떨어뜨렸다.

한편 미국은 지난 10여 년 동안 ‘버는 것’보다 ‘쓰는 것’이 많았다. 이는 거대 규모의 경상수지 적자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 같은 적자를 메워준 것이 바로 중국이었다. 대미 수출로 벌어들인 흑자로 미국 국채 등을 구입한 것이다. 또한 이렇게 흘러들어온 중국의 달러화는 미국의 금리를 낮추었고, 미국은 저금리에 기반한 신용 팽창과 자산(부동산 등) 가치 증가를 통해 소비를 더욱 늘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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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일부 언론은 G20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총재 회의가 ‘세계 환율 전쟁을 봉합했다’고 평가했다.

이런 양국 간 경제 관계는 아직 기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만약 중국의 위안화 가치가 ‘(외환) 시장에서 결정되어’ 급격히 절상되고, 중국의 흑자 폭이 줄어든다면 미국 경제는 어떻게 될까. 중국의 흑자가 미국으로 환류되지 않는다면, 그래서 미국 정부가 국채를 팔지 못해 이후의 구조조정 및 복지 자금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이에 더해 금리까지 오른다면? 그런데도 미국이 이토록 집요하게 중국의 ‘환율 조작’을 문제 삼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장결정적 환율제는 화평연변 시도?

더욱이 ‘시장결정적 환율제’는 중국의 체제를 바꾸라는 이야기와 다를 바 없다. 중국으로서는 화평연변(和平演變:서방 국가들이 중국 내부를 교란시켜 평화적으로 체제를 무너뜨리려 한다는 의미)을 연상할 만하다. 왜 그런가.

적어도 금융 부문에서 중국은 ‘덜 시장적인’ 나라가 아니라 ‘반시장적인’ 나라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위안화의 국제 거래는 공식적으로 허용되지 않고 있다. 중국에 있는 개인이나 기업이 외환을 빌리려면 감독 당국의 승인을 받을 뿐 아니라 등록까지 해야 한다. 외국 기업이 중국 증시에 상장해서 주식·채권 발행으로 위안화 자금을 조달하는 것도 아직 불가능하다. 또한 중국 주요 기업(중점 산업, 경제안보 관련 기업, 유명 기업)에 관한 한 외국인의 인수·합병은 기본적으로 허용되지 않거나 엄하게 통제된다. 즉 중국은 금리·외환·자본 따위의 거래가 철저히 통제되는 나라인 것이다. 미국은 중국이 환율을 조작한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중국 처지에서 ‘환율 조작’은 일상적 경제 행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중국에 ‘시장결정적 환율’을 요구하는 것은 결국 외국 자본이 중국의 돈(위안화)과 기업(주식)을 자유롭게 사고팔 수 있게 하라는 이야기다. 이찬근 교수(인천대)는 이렇게 말한다. “중국 입장에서 위안화의 급격한 절상은, 지금까지의 수출 의존형 발전 노선을 차단하는, 선택 불가능한 길이다. 오히려 미국의 진정한 의도는 ‘시장결정적 환율’ 등의 레토릭(수사)으로 중국을 압박하면서 자본시장 개방을 노리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 경제의 40%를 차지하는 주요 국유 기업과 지방 공기업들이 이후 민영화되면, 미국은 이에 영향력 있는 지분을 확보하면서 중국 정부의 정책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만 본다’는 경구가 있다. 어쩌면 ‘시장결정적 환율’ ‘경상수지 목표제’ 등은 ‘손가락’일 뿐이고, ‘달’은 ‘중국의 자본시장 개방’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