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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체온과 사색'에 해당되는 글 61건
2009. 1. 12. 04:09

2009년 1월 11일 밤 9시 29분, 옥수역 플랫폼으로 국수행 열차가 들어온다. 나는 대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다. 2월이면 곧 홍콩 링난대학으로 안식년을 가는 스승의 얼굴을 볼 겸 해서 다녀온 것이었다. 지난 밤 마신 폭탄주 다섯 잔의 기운이 남아 있어 그다지 좋지 못한 몸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어제보다 더 차디 찬 날씨는 오히려 온몸에 송곳같은 긴장감을 준다. 따뜻한 열차 안으로 들어가 빈자리를 찾아 앉고서는 MP3를 켜고 음악을 들으며, 평소와 같이 주위를 살펴본다. 앞에 여행용가방을 끌고 들어와 서 있는 처자들은 나처럼 고향에 다녀오는 길인가 보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휴대폰 폴더를 열었다. 그러고보니 1월 11일, 새해가 밝은지도 열흘하고도 하루가 지나가고 있다. MP3의 볼륨을 조금 높이고 1월 11일이란 단순한 숫자로부터 기인한 잡다한 생각에 잠긴다.

아마도 2년 전부터는 새해계획을 구체적으로 어딘가에 기입을 해 가며 세우지 않았던 듯 싶다. 아무리 계획을 세워봐야 낭비되는 잉크와 A4용지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더 크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올해는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 당장 다음 학기 강의계획서를 전폭적으로 수정해야 하고, 최근 몇 년간 가장 관심을 가져왔던 일의 기간이 두어 달밖에 남지 않아 그와 관련된 준비와 부가적인 일들을 처리하려면 여러 선생님들도 만나야 하고 관련서류도 준비해야 한다. 회사도 이제 청산작업에 들어가 종합보고서에서 맡은 보고서 한 꼭지도 슬슬 준비해야 한다. 읽기 위해 사두었던 책들이 책장에서 먼지만 켜켜이 쌓여간다는 대목에 이르자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러면서 마음은 바쁜데 시간적 안배는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몸의 게으름만 자책하고는 이내 다음 생각으로 넘어간다. 봄이 오는 학창시절(?)의 마지막 학기에는 형편상 한 과목 이외에는 제대로 수강할 수 없는 터라 두 과목을 처리해야 하는 문제도 역시 잘 처리될 수 있을까도 걱정이다. 그리고 집에 가면 밀린 빨래와 청소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고 있다. 이럴 때면 이런저런 마음에 담아둔 내 계획들을 털어놓으면 다정하게 들어 줄 여자친구도 절실히 필요하다. 다시 부질없다는 생각이 고개를 쳐 든다. 이래저래 떠오르는 해야 할 많은 일들 때문에 마음의 데시벨은 점차 커져만 간다. 


조안나 왕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이어폰 바깥으로 열차는 이미 회기역에 들어서고 있다는 안내가 나오고 있다. 이제 내려서 환승해야 한다. 가까운 서울역을 두고 강남터미널에서 오는 까닭은 순전히 집에서 대전역보다 유성금호고속이 가깝다는 이유이다. 한 정거장만 더 가면 되는데 이럴 때면 늘 버스를 타고 오지 말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역시 나는 잡다한 생각의 대마왕이란 생각을 뒤로 하고 오늘은 전철이 아니라 두 정거장에 불과한 버스를 타기 위해 역사 밖으로 나선다. 다시 칼같은 바람이 얼굴을 때리고 목도리는 바람에 들날린다. '겁내 춥네'라는 고향 말이 조곤하게 튀어 나온다. 코트 주머니에 양 손을 찔러 넣고 가까운 버스정류장으로 총총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주 늦지 않은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일요일이란 사실과 매서운 추위 탓인지 거리는 비교적 한산하다. 추위가 온몸에 파고 들면서부터는 여러가지 잡다한 사념들도 모두 도주해 버렸고, 무념의 세계가 펼쳐진다. 오로지 따뜻한 보금자리가 그리운 순간이다. 그러고보면 따뜻한 계절에는 아무도 없는 집이 그다지 그립지 않았는데 이렇게 추운 날이면 넓지 않은 집이 그립기만 한 건 참으로 이율배반적이다. 어제 보일러를 끄지 않고 약간 낮춘 상태에서 나왔으니 실내온도가 크게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란 예측에 속으로 환호했다.


버스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해 내달았다. 집앞에 이르러 편지함에 있던 DM을 챙겨 나의 집 401호를 향해 뛰어 올라간다. 재빠르게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갔지만 바깥 날씨와 큰 차이가 없는 실내가 이상해 가장 먼저 보일러를 확인해 보니 '물보충' 램프에 불이 깜빡이면서 일렁이고 있다. 나의 순진한 예측이 산산히 부서지면서 "젠장"이란 소리를 내뱉게 된다. 하필이면 오늘같은 날 이럴 게 뭐람. 창문 밖으로 넘어가 깜깜한 보일러 앞에서 촛불을 켜들고 물보충 버튼을 돌려 물이 쏟아져 내릴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나의 투정은 계속된다. 보일러를 점검하고 다시 실내로 도둑놈처럼 창문을 타고 넘어와 보일러를 재가동한다. 실내온도 10도. 어느 세월에 이 집이 따뜻해질 것인가란 생각에 아득해진다.


그래도 다시 일주일이 시작될테고, 또 한해를 보낼 것이다. 어느덧 나에게 어떠한 해가 될 것인지란 벅찬 기대보다는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지 걱정이 먼저 앞서는 나이가 된 것이다. 2009년 1월 11일도 소소하게 지나간다.

1. Daniel Powter(다니엘 파우터) - Fly Away
2. Paris Match(파리스 매치) - Stay With Me (English ver.)
3. Jarvis Cocker(자비스 코커) - From Auschwitz To Ipswich

2008. 9. 28. 04:36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살면서 많은 인연을 맺어왔고 단절되기도 하였으며 많은 인연들이 잊혀지곤 했다, 한편 그중 적지않은 인연들은 '관계'라는 이름의 한 그루 나무로 무럭무럭 자라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무성해짐은 결코 순조롭지 않았다. 때로는 밑동을 잘라내는 아픔을 견뎌야 하고, 혹독한 추위도 견뎌내면서 간혹 나타나는 미세한 훈풍에 우리는 관계의 지속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그리고 인연이란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예찬하고는 한다.

때로는 인연이라고 지칭하기도 어려울만큼의 스침이 있다. 그러나 그 스침이 반복되는 순간을 역시 인연이라 한다면 어제 우연히 다시 만난 꼬마아가씨도 이러한 범주에 넣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인연이라 주관적으로 명명할 수 있는 순간이 와도 우리가 그것을 오롯이 대할 수 없는 까닭은 언제나 '상처'라는 방해물 때문은 아닐까. 상처란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우리의 유년시절로 돌아간다면 답은 너무도 쉽게 나온다.

가끔 나 자신은 얼마나 상처받고 싶어하지 않는가에 대한 자문을 해본다. 통상적이라 한다면 '인연'을 되도록이면 만들지 않는 것에서 자기보호를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나의 경우 약간 독특한 것이 사소하고 가벼운 인연의 끈에서부터 놓고 싶어하지 않으려 하는 속성이 있다. 이 속성을 어떻게 정의내려야 할 지는 다소 난감하다. 그렇지만 역시 근원적으로는 상처받지 않기 위함임은 틀림없는 듯 싶다.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본다. 사소함을 소중히 여기는 나의 모습이 어쩌면 상처받은 누군가에게 그 상처를 더 후벼파는 일련의 행위가 될 지도 모른다고. 그렇다면 '상처는 공유할 수 없다.'라는 나의 평소 지론과도 상반되는 결론이 나온다.

내 감정이 소중하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의 상처를 잘 볼 수 있는 상황에서도 침묵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인연과 관계란 것에 대한 모독이나 다를 바 없다. 나는 이것을 '인연과 관계의 모독죄'라고 부르고 싶다. 또 다시 반추해보면 나의 이런 면은 애정이라는 명목으로 누군가와 나 자신이라는 양자 모두를 참으로 용이하게도 범해온 사실도 깨닫게 된다.

당분간 인연과 관계라는 단어를 스스로 사용할 수 없도록 하는 '접근금지'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따라서 피고 'zzacnoon'은  상기 입증에 따라 '인연,관계 모독죄'에 해당한다고 판단되는 바, 용어 접근금지 2,400시간에 처한다.        


※ 재범의 소지가 매우 우려되는 바, 추후 더욱 중벌에 처할 수도 있음을 밝혀둔다.

2008. 8. 26. 19:39

일정한 준비기간을 거쳤지만 여전히 티스토리는 내게 있어 낯설다. 네이버에 있던 포스트들을 노가다로 옮기고, 음악파일들을 업데이트하느라  들락날락하긴 했지만서도 기능 운용 등에 있어 서투른 면이 많다.  앞으로 이 블로그를 통해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또 나눌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프라인에서의 찐한 만남을 블로그에서의 단방향과 쌍방향이 메꿀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오프라인에서 미처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정도는 그 파장이 소소하겠지만 여러 사람들과 나눌 수 있으리라 믿는다.

힘이 필요한 밤에는 이 곳에 들러 따뜻한 음악들을 무한반복하며 들으며 힘을 내셨으면 좋겠고, 지칠 때는 제가 올리는 포스트를 통해 '뭐 저녀석도 비슷하게 사는구만'하면서 약간의 위로를 얻어갈 수 있으면 더할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난 찾아와주시는 분들을 통해 '소통'의 방법을,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내가 얻는 것이 더 많다.)

막상 말을 꺼내니 심야에 쓰는 글이 아니라서 그런지, 그도 아니면 처음이라서 나름 떨고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더이상 할 말도 쓸 재주도 없다.

화이팅합시다~

참고사항: 여기 있는 여러 곡들을 통해 나의 음악적 식견에 감탄해하지 마시라. 본인의 현재 음악적 토대는 식민지 상태임이나 마찬가지이다. 같은 사무실에 있는 엉아의 도움으로 무럭무럭 자랄 생각만 하고 있고 내공은 전혀 없는 상태이다. 말하자면 '귀만 뚫려있는 상태'라고나 할까. 당분간은 쪽팔려도 '식민지 총독' 엉아의 도움 받으며 성장할 생각이다. 엄청난 '참고사항'이지 않은가. 
2008. 8. 25. 05:57

누구나 그렇겠지만 '처음'이라는 단어나 '시작'이란 말에 대해서 나는 유달리 강한 집착을 보인다. 처음이 있다면 과정이란 것도 있을테고, 그 다음에는 결과라는 산물이 있는 것이 세상사 당연한 이치이다. 따지고 보면 어느 것 하나 중하지 않은 것이 없고 그 경중을 비할 수는 없는 것도 마땅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소연해진 세상은 이제 우리에게 늘 '결과'만을 요구하게 되었고, '결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시스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자는 그야말로 시대의 낙오자요, 매우 현실적이지도 못한 자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가지고 있는 무형, 유형의 자산들이 워낙에 적은 탓일까. 아니면 기본에 충실하고 싶은 까닭일까. 위와 같은 단어에 대한 나의 '아련함'은 애달프다. 결과가 없었던 사랑에 대한 아쉬움도, 그 밖에 이루지 못한 많은 것들에 대한 한숨 모두 내가 가는 길과 걸어왔던 길에 축 늘어져 있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처음 시작하는 것들에 대한 내 사랑은 역시 각별하다. 비근한 예로 저예산의 많은 사람들이 보지 않는 영화를 찾아 본다거나 혹은 인디레이블 계열의 음악들을 찾는 취향도 다 그러한 이유에서 태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마도 나는 그런 류의 영화나 음악을 좋아한다기 보다는 그런 행위에 가담하고 있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부러움이 더 깊은 것이 모범답안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주류적인 위치의 멀티플렉스에 걸린 영화나 모두 즐겨듣는 음악, 그리고 말초적이고 감각적인 언어를 현란하게 구사하는 티비 프로그램들을 보면서 나 역시 낄낄대고 자지러지고는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저항감'이 드는 것은 결코 주류도 될 수 없으면서 주류에 편입해 들어가려고 나도 모르게 불쑥 들이대는 '속물 근성'에 대한 시위 혹은 '나이 듦'에 대한 두려움의 표지라 할 수도 있을 듯 싶다.


결과가 좋아 모든 외로움과 고독이 사라진다면 이렇게 살지 않을테지만 그럴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둥실둥실~ 팔랑팔랑~ 이렇게 사는 방법은 어디 없을까. 바야흐로 '사랑'을 해서 에너지 충전을 해야 할 때임을 느낀다. 방전된 것을 임시방편으로 때우려고만 하니 자꾸 삐끄덕 고철소리를 낸다.


이제 다시 생각해 보니 제목의 '아름답다'도 허위와 위선에 불과하다. 왜냐면 아직은 너무나 무덥기 때문이다.

2008. 8. 25. 05:56

지난 밤, 당분간 같이 지내고 있는 친구를 호출해 같은 버스에서 만나 늦은 귀가를 하던 중에 출출하다는 의견의 합의에 따라 옆 동네 경희대 부근에서 하차하여 참치집을 찾아 들어가 배도 채우고 주님 1병씩을 격파하고 들어와 잠이 들었다. 그래서 모처럼의 숙취로 인한 갈증 때문에 채 박명의 시간에 일어나게 되었다. 생수를 벌컥벌컥 마시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지만 누우면서 떠오른 생각 탓이었는지, 아니면 연가를 내면서까지 해야 할 가족의 일 처리가 있다는 압박감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컴퓨터를 켜고 포스트를 쓰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사실 생활에 있어 권력관계의 일을 고백한다는 것은 나 자신까지 까발리는 일이기에 글로 옮기기는 쉽지 않지만 오늘은 이 얘기를 털어놓을까 한다.


사전 이해를 돕기 위해 우선 내 전공에 대한 얘기를 하겠다. 내 학부전공은 ‘중국어’이고, 석사부터의 전공은 이른바 중국학(이 학문의 범위를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잠시 설명을 하자면 한국에 있어서 ‘지역학’은 한 지역의 현대 정치, 경제, 사회문화를 포괄적으로 공부하는데 그 가운데에서 세부전공으로 ‘중국정치’방면으로 공부를 하고 있음을 밝혀둔다.)이다. (어문학 쪽으로는 영 소질이 없었고, 뒤늦게 사회과학 방면에 눈을 뜨게 된 것이라 이렇게 되었다. 아울러 학부는 대전의 지방 국립대를 졸업하였고, 대학원부터는 서울의 이문동에 위치한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음도 밝혀둔다.)


각설하고, 박사과정 진학과 동시에 현재 몸을 담고 있는 위원회에 들어와 경제적 생활을 돌보면서 어렵지 않게 작년 1학기가 시작되기 전, 3학기를 마치고 수료를 남겨두면서 생각했던 계획에 따라 휴학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아는 사람은 다 알다시피 올해 초, 석사과정 이후의 세부전공에서 다소 벗어난 어학 방면으로 첫 강사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지금부터 떠드는 이야기는 바로 이 강사생활 시작과 관련된 몇 가지 비하인드 스토리라고 할 수 있겠다. 아직 숙취로 인해 두통이 좀 있어 이야기를 잘 풀어갈 수 있을지, 또한 지금부터 한 시간 이내에 관련된 이야기를 끝마칠 수 있을지 약간 우려되는 바가 있지만 이어서라도 계속 쓸 생각이기 때문에 중간에 삼천포로 수시로 빠지는 것에 대해 양해를 좀 해주셨으면 한다.


환언하여 작년 휴학을 하면서 나는 직장생활로 소홀해진 공부에 대한 자극이 스스로 요구되었다는 점, 서른셋이라는 나이면 될테지라는 세속적인 이유, 답답한 직장생활의 탈출구가 필요했다라는 점, 학생들을 하루빨리 만나고 싶다라는 순수한 동기 등 여러 가지 이유에서 강사생활 시작에 대한 집착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의 대학 시간강사는 기본적으로 모교를 중심으로 첫 시작을 하게 되는 것이고, 그와 관련된 학회에서의 정치적(?) 활동, 그리고 학번에 따른 서열과 아울러 대학 전임교수들 간의 이해관계 등 여러 가지 제반사항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면서 강의하는 학교의 외연을 확장하게 되는 것이 전공에 관계없는 전반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모교에서 스타트를 끊지 못한다면 연구자로서나 강사로서 이 바닥에서 제대로 생활을 영위하기에는 애초에 글러먹는 시스템이 바로 한국적 시스템이기에, 그런 관습에 의거하여 나 역시 모교에서 스타트를 끊어야 하는 처지였던 것이다. 그래서 첫 시작은 전적으로 스승들의 배려와 하사에 의해 이루어지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그 시스템을 깨려는 행위는 어떠한 의미에서는 이적행위 아니 어쩌면 전복행위에 더 가까운 일이 될 수 있다.


어찌됐든 나는 위에서 언급했던 강사생활에 대한 욕구로 인해 스승이 생각났을 때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강의가 아닌 모교의 문을 인위적으로 두드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또 거만하게도 모교의 전공에서 내가 첫 학번이라는 점, 중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동기 녀석 둘을 포함해 가장 먼저 석박사과정에 진입한 선구적인(?) 케이스라 이 정도면 당연한 대접이라 생각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서울권 메이저대학의 경우는 이와 다르게 위에 먼저 공부를 시작한 선배들이 줄을 서 있는지라 이른 나이에 모교에서 강사를 한다는 것은 조교를 한다거나 모종의 사유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서열이 떨어지는 타대학이나 지방대학에서 시작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어쩌면 강사로서 우위적인 위치에 서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역시나 염려했던 대로 본론은 시작도 못하면서 이야기를 질질 끌어가고 있음이 선명해진다.  모교에는 현재 6명의 전임이 있는데 그 중 다섯 분은 모두 스승이고, 석사시절 생활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대전에 내려갔을 때 2년간 국립대 조교로서 일할 수 있는 배려를 해주기도 하였다. 국립대 조교는 계약직이긴 해도 대체로 공무원 7급에 해당하는 대우를 받는데다 교육직렬이라 일반직 공무원이나 사립대학 조교, 그리고 웬만한 시간강사는 따라잡을 수 없는 정도의 보수를 받는다. 지금은 내가 그만 둔지도 4년이 넘어 정확히 산출할 수는 없지만 석사학위 이수 등 약간의 경력을 인정받는다면 이런저런 수당을 합쳐 적어도 세전 3,200 이상의 보수를 받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런 고액연봉의 조교를 한다는 것은 전국적으로 통틀어 얼마 되지 않는 까닭에 나는 당시의 어려운 민생을 2년간 해결할 수 있었고, 이후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에 들어오게 되었던 간접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던 터라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기실 스승들에게 엎드려 절이라도 해야 하는 입장이다.


아무튼 나는 작년 1학기 어느 날에 대전행을 감행하게 되었다. 모교의 경우 한 분을 제외한 4명의 전임이 연배로 40대인데, 그 중에서도 7살 차이의 술자리도 종종 같이 하는 가장 친한 스승을 제외한 당시 학과장을 맡고 있던 사람을 찾아가서 이제 강의를 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하게 된다. 물론 일언지하에 거절당한다. 지나고 생각해보면 얼마나 내가 선생에게 우습게 보였을까란 생각에 웃음이 난다. 메이저대학 출신의 똑똑한 두뇌를 가지지도 못한 내가 스승이 먼저 강의를 맡지 않겠냐고 제안을 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먼저 찾아가 강의를 주셨으면 한다라고 했으니 얼마나 기도 차지 않는 일이 되었겠는가. 물론 당시 직접적인 거절의 의사보다는 공부를 우선 다 마쳐야 하지 않겠냐는 간접적인 표현을 듣기는 했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사실 직접적인 거절의사보다 더 마음이 좋지 못했다.


그렇게 씁쓸하게 서울에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장 친하다는 선생님과 술자리를 하게 되면서 강의를 맡게 되는 자격에 대한 입씨름을 하게 되었다. 그 선생님의 논리는 대학 시간강사도 이제는 원칙적으로 ‘박사취득 이상의 자’라는 것이었는데 그 말에 나는 기분이 많이 상해 이렇게 대꾸했었다.


“그럼 선생님들의 모교에서 오는 박사과정 1학기를 겨우 마친 후배들의 경우는 뭐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나는 이와 같이 당시 제자라는 이유와 더불어 모교 전임들 간의 권력관계 등에 의해 강사로 첫 발을 내딛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항의가 있었던 탓이었는지 올해 1학기 특정 과목을 맡았던 시간강사 선생님이 모 대학 전임으로 가게 되면서 그 자리를 메꿀 수가 있었는데 강의가 배정된 것은 아직 젊기 때문에 그 과목을 가장 효율적으로 가르칠 수 있고,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좋은 자극을 줄 수 있으며, 갑자기 다른 강사를 구하기도 힘들다는 등의 사유를 적은 내용으로, 해가 바뀌면서 새 학과장이 된 그 친한 스승님의 타 교수들에 대한 이메일을 통한 의견 조회가 이루어지면서 이전의 스스로 조성한 어수선한 상황이 비교적 수월하게 정리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한 학기 강의를 마쳤고, 학생들에 대한 미안함과 진실로 노력하지 못했음에 부끄러움만 남게 되었지만 그래도 다음에는 좀 더  잘해보자는 마음을 먹게 되었는데 그 동기는 지난 5월 무렵 어느 지인의 결혼식에 갔을 때 잠시 뵙게 되었던 바로 그 추천해주신 분을 만나 다음 학기 안식년을 떠나는 선생님의 강의과목 중 하나인 시사중국어를 맡기겠다라는 얘기를 직접 들은 것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적어도 난 확정적이진 않더라도 추진해보겠다라는 이야기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한 학기가 마무리될 무렵이면 다음학기 강의시간표가 짜여지면서 대략의 강사진도 꾸려지는 것이 기본적인 틀이었고, 기본적으로 타지에서 오는 강사에게 요일을 정하는 선택권을 주는 비교적 민주적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사중국어는 강사가 미정인 채로 금요일로 편성된 것을 알게 되었다. 조교에게 문의한 결과 눈치로는 강사가 정해졌다라고만 하는데 그게 나인지 다른 사람인지 전혀 짐작을 할 수 없었다. 만약 나를 감안한 것이었다면 사전에 직장을 다니는 내게 편의를 제공하는 차원에서 언질이 있었을 터인데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을 감안한다면 현재 상황은 지극히 불투명한 것이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의사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오해가 일정하게 있을 수 있겠지만은...

 

여기까지가 지루하게도 사전 정황에 대한 설명이다. 사실 장광설인 서론에 비하면 말하고 싶은 본론은 그리 길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진즉 대학원에 들어가겠다라는 생각을 하면서부터 끝까지 한 번 가보겠다라는 마음이었고, 또 시간강사로 생활을 영위한다는 것이 결코 녹록한 일이 되지 않을 것도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와 관련된 어느 정도의 고초와 부조리는 견디겠다라는 마음가짐은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막상 그런 상황에 진입하고 보니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알겠다.

 

이는 단순히 강의 하나를 연장해서 맡으면서 강사 타이틀을 유지하겠다라는 욕심보다는 스승들에 대한 인간적인 섭섭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스로 견지하려고 하는 원칙에 대한 원론적인 문제제기가 더 크다고 할 수 있겠다.

 

괴테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인간은 보이는 대로 대접하면 결국 그보다 못한 사람을 만들지만, 잠재력대로 대접하면  그보다 큰 사람이 된다' 내 생각에는 지금 나를 길러낸 스승들이 나를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대로 대접하고 있다라는 결론에 이르고 있고, 또 무엇보다도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런 일련의 상황들이 진리를 규명하고 좀 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를 하고 싶다는 나의 원칙을 느슨한 상태라도 해체하고 파괴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기적인 수입이 있는 상황에서 굳이 이런 모험까지 감행했던 것이 전적인 나의 책임으로 돌아와야 할테고 또 책을 읽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한 판에 학계의 부조리한 권력구조 속으로 미리부터 편입되어 들어가려는 나의 행태는 자기바판을 받아 마땅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견딜만하고 내 모든 것을 잃지 않은 상황이라 이미 그 구조 속으로 깊숙히 편입해 들어가 복무하고 있는 다른 선배들에 비해 나은 형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난 여전히 두렵다. 지금은 이렇듯 일정한 '자기검열'이라는 것이 존재하지만 향후 이러한 자기검열마저 무시하면서 전적으로 생활의 전선으로 뛰어들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 말이다. 스승들에게 감사한 것은 감사한 것이고, 역시 섭섭한 것은 섭섭한 것이다. 그러나 공부를 하는 사람으로서 난 내가 견지해 나가야 할 원칙이 있는 것이고 그 용납 가능한 최후의 보루를 포기한다는 것은 나는 '영혼을 파는 행위'라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전혀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다.

 

오늘 이렇게 장문의 글을 쓰는 까닭도 앞으로 이러한 속상함이 심화된다면 내 자신이 모교를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나'를 잃지 않겠다라는 의지 때문이었지만, 결국은 현실의 불만 표출과 지지리 궁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겠다.  

 

   참.. 내 제자들이 이 글을 볼 수도 있겠는데 혹여나 보는 사람이 있다면 못 본척 해주었으면 하는 희망만 품어본다.                        

2008. 8. 25. 0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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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잦아들 것만 같았던 촛불이 다시 타오르고 있다. 정부의 오버로 이제 다시 공은 시민들에게 넘어온 것이다. 가장 강렬했던 어제의 시위를 현장에서 지켜보면서 다시금 들었던 생각은 이제 여기에서 좀 더 '인내력'을 가지고 버텨야 한다는 것이다.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드높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일 뿐이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명분'이다. 물론 이미 충분한 명분을 가지고는 있지만 좀 더 큰 명분을 선점할 때에서야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 (강제진압에 따른 말도 안되는 폭력에 대한 분노와는 별개로 현실적이고 전략적인 차원에서의 이야기이다.)


2. 나는 나를 포함한 현대 대한민국 사회의 대중을 그리 신뢰하진 않는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 것도 대한민국의 대중이 여전히 먹고사는 것에만 급급하고, 가족 중심적이라는 것에 기인한다. 물론 개별적인 비판이 아닌 '신자유주의의 심화'라는 구조적 요인에서 오게 된 필연적 결과라는 것이 더 큰 요소이다.  여하튼 결과적으로 좀 더 잘 살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우리는 무자비한 '자본'의 침략을 너무나 쉽게 용인했다. 그래서 말로만 '존경하는 국민'을 외치는 진실이라고는 털끝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대통령도 만들어 낸 것이다. 이제서야 대중은 그것을 시정하려고 노력하고는 있지만, 이 땅의 자본은 벌써 굳건하게 땅에 뿌리박고 있고, 20년 전에 이룩하였던 민주화란 이름으로 뿌렸던 '민주'란 씨앗은 이제서야 싹을 틔운 정도에 불과하다.      


3. 이런 의미에서 촛불은 이제 '자본'과 '민주'의 대립을 상징하는 것이라 해도 무방하고, 쇠고기는 이미 부차적인 문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반드시 우리는 애써 울타리를 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울타리는 그저 2MB의 퇴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언제고 누가 와서 짓밟아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질경이'와 같은 사회가 되느냐, 아니면 언제고 결국 꺾이고 마는 온실속의 화초와 같은 사회가 될 것인지는 이제 촛불이 결정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리 낙관하지도 비관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저 참여하고 지지할 것이다.


4. 많은 사람들이 더이상 많이 다치지 않았으면 하는 희망을 품지만, 그러기는 힘들 것 같다. 왜 우리는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가.

2008. 8. 25. 05:48

지난 주말 연이틀 시위에 참가하면서 그리고 집에서 혼자 있으면서 인터넷 기사들을 섭렵했던 탓이었을까. 거리에 나섰다는 가벼운 흥분과 연대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새삼 깨닫게 되면서 찾아온 부작용이 바로 '과열'이었다. 그 덕분에 잠은 지나칠 정도로 설쳤고, 밥을 먹어도 맛있지 않았으며 초조했다. 그래서 밤에 소주를 한 병 넘게 비우고도 한참을 헤메다가 겨우 잠들 수 있었는데 다시 사무실에 출근하면서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게 되었다.


이제 신문기사나 동영상 등을 보면서 감정적으로 격화되는 것을 주의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실 현장에 나가게 되면 일정한 감정의 소용돌이 안으로 빠져들어 가지 않을 수 없는 듯 싶다. 이른바 군중심리와는 다른 어떤 말로 형용하기 힘든 상태에 있었지만 그것이 적절치 않은 일임을 알겠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는 이번 일이 단기간에 끝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살펴보면 수 만의 시민이 혹은 앞으로 어느 정도 더 불어난 숫자의 시위가 이루어진다 해도 (물론 말 그대로 수십만 명이 될 경우에는 그 변수가 매우 크다.) 곧바로 이번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다. 장기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명박 정권은 지금이라도 물러나야 하는 것임이 타당한 일이겠지만 이제 100일을 맞는 신생정권이 무작정 넘어가는 것을 대다수 국민들이 선뜻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분위기를 살펴 본 결과 거리에서 이명박 퇴진을 외친다 할지언정 거리에 나오지 않은 대다수 사람들은 쇠고기 전면재협상에 준하는 어떤 모션을 취하기만 한다면 얼마든 정권 지속을 용인하겠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명박을 퇴진시킨다 하더라도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딜레마에서 기인하는 것이고, 퇴진 이후 올 커다란 파장 역시 두려운 까닭이다.


386세대는 87년 6월항쟁 당시와 달리 광화문에 시위대가 진출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를 두는 것 같지만 사실 2008년 대한민국의 상황은 6월항쟁이나 1960년 4.19혁명 때와는 다르다. 그 때는 일련의 모든 부패와 악들이 차근차근 축적되면서 급속도로 폭발했던 것이라 모든 시민들이 동의할 수 있을만한 수준의 운동이었지만, 지금은 모든 사람이 동의할 만한 수준으로 명분을 쌓지도 못했고 아울러 많은 문제에 다각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 이외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표면적으로 정책적인 실책 이외의 것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정작 우려하는 바는 즉 현 정권의 독단적 국정운영에서   '민주주의의 단절' 혹은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코드가 읽히고 있다는 것이다. 피상적인 측면에서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온라인을 기반으로 매우 빠른 속도로 확대되었고 재생산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이고 양적인 차원의 문제이지 내용과 질적인 차원에서의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은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제대로 구현되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를 쉬운 말로 치환하자면 현재의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는 국민들 대다수가 납득할 수 있는 마땅한 '상식의 수준이 실현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현 사태의 가장 큰 동인이 되었던 쇠고기 문제뿐만 아니라 수면 속으로 잠복해 있지만 고개를 내밀려 하는 한국사회의 제반 문제들이 바로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에서 관철되고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울러 '민주주의 정신의 기본요건'을 전혀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에서 모든 문제가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문제의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은 바로 이런 기본적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수준의 조처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이는 실현하는데 있어 매우 점진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에 가장 큰 맹점이 존재한다.


한편,  일상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생활인'으로서의 국민들에게는 이것이 보통 절실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역시나 사람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나와 내 가족이 어떻게 잘 먹고 살 수 있을 것인가라는 민생의 문제인 것이다. 미국산 수입쇠고기 문제의 경우, 이런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라는 영역에 있어 간접적인 영향력을 안겨주었기 때문에 국민들의 전폭적인 반발을 불러 일으켰지만 앞으로는 마치 한 개인이 인생에서 복잡하고 해결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일은 단번에 치유하려는 현명함을 보이려 하기보다는 우선 덮어두고 발등에 떨어진 불을 먼저 끄려고 하는 성향처럼 그런 선상에서 문제를 덮고 넘어갈 가능성이 현재로서는 가장 크다.


따라서 이번 주 정부가 내놓으리라 예상되는 인적쇄신과 개편의 규모와 범위가 어디까지일지 섣불리 예단할 수 없지만 아마도 일회성에 불과한 조처와 더불어 정부의 정책보류 등의 꼼수에 의해 우리 국민들은 이를 용인할 개연성이 매우 크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수는 아직 잔존해 있다. 앞으로의 촛불집회가 어떤 방식과 방향으로 흘러가고 이에 대한 공권력의 대응수위가 어느 수준에서 결정되느냐에 따라 향후 정국에 미치는 파장이 판가름 날 것으로 보인다.


여담이지만 개인적으로도 사실 많은 문제를 노정하면서도 이를 치유하기 위한 근본대책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전에 둔 일을 먼저 해결하고 넘어가려는 경우가 많다. 이런 개인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지향을 비추어 봤을 때 국가와 사회란 것도 그 양상과 변화가 크게 다르다 생각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결국 국가와 사회라는 것도 따지고보면 '사람'이 모여 형성된 곳이라는 연유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반복적인 누더기 수선을 일삼으며 대한민국호의 재출항을 시킬 것인지, 좀 더 인내력을 가지고 부두에 정박을 계속하며 일신된 대한민국호로 변모시켜 힘차게 출항을 할 것인지는 이제 모든 한국사회의 일원들에게 주어진 선택의 문제라는 것은 분명하다.


과열과 냉정사이에서 '나'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인가. 여하튼 예상치 못했던 과제까지 주어진 셈이다.  

2008. 8. 25. 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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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http://oktimes.cafe24.com/ ('사진관'에서)


촛불문화제도 벌써 한 달째, 18차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거리로 나간지도 오늘로 3일 째 접어들었다. 이를 두고 '비폭력'과 '평화'를 상징하는 촛불문화제에 집시법을 위반하는 가두행진이 적절한 것인가라는 적지않은 반론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한 달간의 촛불문화제를 통한 평화시위는 우리가 '국가'와 전혀 소통되지 못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졸속협상의 결과로 발동된 촛불문화제를 두고 오늘 난 두 가지를 얘기하고자 한다.


우선 '국가'와 '사회'의 관계에 있어서 '국가'를 유일하게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것은 '사회'이다. 이론상으로는 사회는 국가가 행하는 독단적 정책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충분한 역량을 가졌다 할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국가가 행하는 정책에 적극 협력할 의무를 가진 것도 바로 이 사회이다. 이렇게 적절한 선에서의 견제와 협력은 하나의 민주주의 국가를 건전하게 살찌우는 근본적 동력임은 말할나위 없다. 이렇듯 권한과 의무를 적절히 행사하는 사회를 우리는 흔히 '시민사회'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 대한민국의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다. 아니 오히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절대절명의 위기가 도래했다고 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다. 이는 대한민국의 시민사회가 미처 성숙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그 성장이 정체되는 지점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민사회가 제대로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되고 있는 까닭은 바로 한국사회에 이미 깊숙히 침투해버린 '자본'이 막강한 힘을 본격적으로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건전한 시민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다양한 개인의 스펙트럼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나는 그 실질적인 예로 한 달째 지속되고 있지만 그 힘이 하나의 방향으로 응축된 힘을 갖지 못하고 있는 촛불문화제를 거론하고자 한다. 쇠고기 졸속협상에 따라 장관고시를 목전에 두고 있는 지금 국민 대다수는 그 잘못된 정책에 성토를 하고 공감하면서 정책방향의 근본적 수정을 정부에 요구하고 있지만 국정운영의 최고책임자인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그 주변 책임자들은 '꼼수'를 통해 이 위기를 적당히 넘어가고자 하는 모션을 취하고 있다.


물론 촛불문화제를 비롯한 인터넷세계에 들끓는 비판여론은 일정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예컨대 장관고시의 잇따른 연기라던가), 지극히 온라인적인 인터넷과 모든 집시법을 제자리에서 지켜가면서 열리는 촛불문화제로는 이제 더이상 현 정부의 태도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지극히 합법적이고 일정한 바운더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저항은 충분히 통제하고 일정한 시점이 지나면 이 정도의 국면 정도야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다는 정부의 자신감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솔직히 토로하자면 촛불문화제가 그동안 거행되면서 나는 오늘까지 네 차례에 걸쳐 직접 참여를 한 바 있다. 그러나 아직도 얼굴을 들 수 없다. 혹여나 부끄러운 내 자신을 감싸기 위한 형식적인 도구로 사용하였고 사용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란 생각에 미치면 부끄럽기 그지없다. 더군다나 지난 3일 동안의 가두행진에는 적극 참여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개인의 의견과 결정이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는 사회의 과정은 어느 정도 부단히 진행되어 왔다고 할 수 있지만 '무한경쟁'을 생산수단으로 하는 다른 한 면의 이 사회에서 나는 그 경쟁에 뛰어든 한 개인으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해온 탓이었던지, 건전한 시민사회 형성을 위한 개인적 '용기'와 '연대'에는 너무나 소심해 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너무 튀어서도 안 된다." 어느새 나는 내가 지켜야 할 경제적, 개인적 가치들에 포섭되어 '용기'와 '연대'로  디자인되어야 하는 건전한 시민사회가 아닌, '자본'과 '경쟁'으로 이미 디자인된 불량 '자본사회'의 적극적인 일원으로 복무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근대국가가 세워지고 그 틀 안에서 '자유'와 '민주'라는 절대적 가치를 쟁취하기 위해 이루어진 일련의 모든 행위들은 사실 '불법'이었고, 그 불법을 탄압하고 강제했던 것은 늘 '합법'이었다. 사회와 소통하지 않으려 하는 국가에 대해서 좀 더 적극적인 저항을 모색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반드시 '비폭력'과 '평화'를 상징하는 지금의 촛불문화제는 지속되어야 하지만 이제 우리는 거리로 한 발짝 더 발걸음을 떼는 '용기'와 '연대'를 필요로 한다.


촛불문화제에 참가하지 않았다고 해서 하등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형식'과 '내용'이 있다면 누구나 내용이 보다 중요한 것이라 말할 것이다. 촛불문화제에 참가유무로 형식적인 '용기'와 '연대'를 판단하기 보다는 어떤 곳에 있던 우리를 대신하여 실천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고마워할 줄 알고, 또한 같이 하지 못함을 솔직하게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 나처럼 형식적으로 거리에 나앉아 있는 사람보다는 백만배 낫다.


물론 실천적인 차원에서는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가 힘을 보태는 것이 절실히 요구되지만, 부득이 시공간적 이유로 말미암아 그리 하지 못한다면 광화문에, 그리고 전국의 많은 도시에서 거행되는 촛불문화제에 '용기'와 '연대'라는 진정한 '마음'을 보내보는 것은 어떨까?


이 마음들이 실질적으로 집합될 수만 있다면 우리 사회는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을 수 있다고 나는 여전히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 모두 '촛불문화제'에 '용기'라는 마음을 보내자."


2008. 5.27 화

비디아.      

2008. 8. 25. 05:41

신현림의 詩 '슬럼프에 빠진 그녀의 독백'을 오랜만에 다시 읽게 되었는데 마음을 친다.

청춘의 벌판을 지나고

그곳은 타버린 무명옷으로 굽이치지

애인도 나만의 방도 없었지만 시간은 많다고 느꼈지

여린 풀잎이 바위도 들어올릴 듯한 시절

열렬하고 어리석고 심각한 청춘시절은 이제 지워진다

언덕을 넘고, 밧줄 같은 길에 묶여 나는 끌려간다

광장의 빈 의자처럼 현기증을 일으키며 생각한다


지금 나는 무엇인가?

내가 원했던 삶은 이게 아닌데

사랑이 없으면 시간은 죽어버리는데

옷장을 열어 외출하려다 갈 곳이 없듯

전화할 사람도 없을 때의 가슴 그 썰렁한 헛간이란,

헛간 속을 들여다봐 시체가 따로 없다구


사람을 만나면 다칠까봐 달팽이가 되기도 하지

잡지나 영화도 지겹도록 보아 그게 그거 같고

내가 아는 건 고된 노동과 시든 꽃냄새 나는 권태,

 내일은 오늘과 다르리란 기대나

애정이나 행복에 대한 갈망만큼 지독한 속박은 없다


나라는 연장을 어떻게 닦아야 하나


'무한경쟁사회' 그리고 '승자독식의 시대'는 이렇듯 '나'라는 존재의 의미를 끊임없이 되묻게 한다는 점에서는 유의미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행복에 대한 갈망을 지속적으로 재창출함으로써 '우리'를 더 질곡의 늪으로 빠져들게 한다는 점에서는 무의미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이토록 괴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다고 해서, 후세대들의 미래는 이대로 방치할 것인가.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이기적인 세대인 줄 아직도 모른다. 적어도 술자리나 식사자리에서 안주꺼리로 삼는데 그치지는 말자. 기실 그런 풍경 중 대다수는 '우리'를 걱정한다기보다 '나'와 '우리 가족'만을 위한 대책반을 꾸리고 있다는 현실적 모습의 반영일 따름이지 않은가.


'사랑'이나 '연대'도 없으면서 무슨 행복 따위를 갈망할 것인가. 아니 어쩌면 행복의 껍데기를 더듬으면서 행복이 가까운 곳에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훗. 이럴 땐 '개뿔'이란 단어가 생각난다.    

2008. 8. 25. 05:39

 **님.
메일 꼬리에 살짝 달아놓으셨길래
뭔가해서 들어왔다가 히히 웃고 가요_
휴.
막 어렵고.
특히 저같이 쉽게쉽게 웃으며 살고싶은 사람한텐. 정말 어려워요. 진짜.
맘껏 질책하셔도 돼요_ :D

출처: http://oktimes.cafe24.com/ 방명록에서.


얼마 전 선배 홈피에 마실을 갔다가 위의 방명록 글을 보았다. 몇 일이 흐르는 동안 최근의 내 심리적 상황과 맞물린 탓인지 이 글귀가 뇌리에서 내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출처의 선배와 금요일 저녁 콜로키움 첫모임의 연회 마지막3차에 새롭게 재발견하게 된 소중한 동네 실내포장마차(모든 안주 5,000원, 서비스 안주 당근, 계란말이, 국물)에서 이 글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 방명록 글을 보고 정말로 퍼니하게 사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인데... 왜 언젠가부터 이렇게 재미있지 못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마음으로 인지하게 되었다. 내 삶이 얼마나 고리타분하고 어렵게 되버렸는지에 대해... 나도 저렇게 쉽게쉽게 웃으며 살았던 시절이 분명 존재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점차 그런 경계에서 멀어지더니만 이제는 그 곳은 머나 먼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가만히 생각해 본다. '살면서 누군가의 마음을 은결들게 한 탓일까.', '아니면 세상의 좀 더 복잡하게 얽힌 속내를 들여다보기 시작했기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넓게 보려하는 것이 결국 벗겨보니 강요와 폭력으로 얼룩진 가식에 불과하다는 것이 쪽팔려서였을까.' 그러나 사연은 많고 해답은 없다.

 

진심을 가지고 삶을 대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진심이란 것도 때로는 아무 것에도 쓸 데 없는 것임을 알겠다. 그리고 그 역시 나를 보호하기 위한 알량한 무기로 둔갑하기도 한다. '너'를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 지금의 이 무료하고 재미없음은 그 노력하지 않음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아무리 가리려 해도 얄팍한 내 자신은 가릴 수 없기 때문에...

 

모종의 자기합리화란 것을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이제 지난 날을 잡을 수도 또 회귀할 수도 없다면 과거의 그 날의 즐거움들을 간직하면서 이 고리타분함 역시 상존시킬 수는 없을까. 그것은 기실 요원한 일은 아닐 듯 싶다. 다만 누군가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하릴없이 내 자신의 사랑만을 채색하는 모순적인 짓 따위만 범하지 않는다면야...

 

올해도 아련하게 짧게 피어나는 봄을 알리는 비가 내리지만 겨우내 켜켜이 쌓인 내 마음의 먼지는 쓸어가지 않는다. 나에게 새푸른 초록을 관조하고 훈풍을 쐬며 이 봄을 누릴 자격은 그 먼지를 스스로 털어내지 않고서는 오지 않을테지.      

2008. 8. 25. 05:37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란 詩 마지막 문구는 다음과 같다. "마른 나무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이 구절을 두고 고등학교 국어(이 시를 배우는 것이 고등학교인지 중학교인지는 모르겠다. 나 때는 배우지 않았는데...)에서는 '마른 나무가지 위에'를 '절대고독'의 상징이라 하고 '까마귀'를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화자 자신을 일컫는 것이라 하며 이 두 가지가 결합하여 어느 곳에 마음 한 켠 둘 곳없는 인간 본연의 절대고독을 말하고 있다 한다. 예전에 이 시를 두고 또 어떤 사람은 '절대고독'이란 짜장면 곱배기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그런 경지의 것이라 유머로 표현하기도 했다.


여튼 블로그에 들어와 보니 어느덧 벌써 방문자가 15,000명을 넘었다. 원래 이벤트를 할까 했었는데 그만두었다. 지난 늦은 가을 이벤트를 했던 것이 10,000명이었는지, 11,111명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렇게 블로그 방문자가 넘어가면서 기나긴 겨울이 지나갔고 봄이 성큼 다가왔다. 확연한 꽃샘추위를 보여주고 있지 않지만 몇 일만 버티면 봄이 우리에게 활짝 큐사인을 날릴 것이다. 이렇듯 계절은 어김없이 변화하는데 늦은 가을부터 시작된 내 고독의 상념은 깊어진 상태에서 헤어나올 줄을 모르고 있다.


몇 개월을 두고 생각해봤는데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것들은 마음의 외로움도 또 몸의 외로움에 그치는 것만은 아닌 듯 싶다. 위에서 언급했던 절대고독의 수준을 넘본다고 감히 얘기할 수는 없겠지만은 무엇으로도 쉽게 채워지지 않는 시간이 계속되고 있다. 덕분에 일상은 더 무료해지고 황량해졌다. 물론 강의하는 그 순간만큼은 마음의 별이 가득차 있지만 강의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어느새 그 별은 사라지고 없다.


이제 삼십대 중반을 바라보며 그 어떤 인간 본연의 모습도 채 갖추지 못한 설익은 상황, 그리고 어느정도 예측가능하게 된 현재와 미래의 불확실성... 이는 사춘기 시절의 질풍노도와는 또 다른 단계이다. 그 시절은 예측가능하지 않은 불확실성이었기 때문에 불안함도 막연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불안함은 실제하고 구체적인 양상을 띤다. 그렇다고 낙담하거나 비관하는 상황도 아닌데 나는 무엇을 채우려 이 황량함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것일까.  


배움에 대한 신뢰도 여전하고 직장생활을 마감한 뒤의 경제적 궁핍이 마냥 두려운 것도 아님에도 말이다. 난 내 자신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과 연대하는 삶을 꿈꾼다. 그러기 위해선 필수적인 요소가 세 가지라 생각해왔다. 즉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 필요한 지식', 그리고 '지식을 통해 얻게 되는 세상에 대한 인식', 마지막으로 '지식과 인식의 단계와 더불어 부단히 진행되어야 할 실천'이다. 지금 가만 생각해보니 나오는 해답은 이 마지막 실천에 너무나 소홀하단 것이다. 실천의 결핍은 내 삶에 책임을 지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으로 이어지면서 나를 더욱 더 벼랑 끝으로 몰아간다.


이런 혼돈의 와중에도 봄날은 시작되고 있다. 혼자임을 알면서도 결국 내게 필요한 계기란 것도 사람으로 귀결되는 것인가.  

2008. 8. 25. 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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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였을까. 나는 떠나가는 관계에 대한 공포때문이었는지 새롭게 맺게 되는 옅은 관계에 대해서도 하릴없는 집착을 보이기 시작했다. 가만 생각해보면 이는 두 가지 측면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듯 싶다. 하나는 새로운 관계에 산뜻한 칠을 하고 윤기를 더해 유지,발전하고 싶어하는 이 세상 누구나 갖는 희망의 측면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나를 사랑하게 되면서 그 관계의 대상과 진정으로 소통하고자 하는 욕심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나에게 긍정적으로 다가왔던 사람이 떠나가는 그 순간을 몹시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 되었고 또한 새로운 관계가 채 무르익기도 전에 관계의 줄이 허무하게 끊어지는 것은 더이상 두고보지 않는 삶의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내가 상처받기 싫어하는 것은 어디까지인지. 그리고 내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아니 외우지 못한 낯익지 않은 상대를 배려하는 것은 어느 정도의 힘으로 미세하게 임계점을 조절해야 하는 것인지 난 여전히 모르겠다. 우리가 관계의 근육을 키워나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앞길에 불쑥 튀어나오는 작은 오해의 송곳들을 요리조리 지혜롭게 피해 공을 피해 나가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는 혼자 힘으로 아무리 애를 써도 할 수가 없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영원히 평행선을 달린다.'란 말을 종종 언급하는데 이는 그것이 사랑 혹은 따뜻한 우정의 종착점에 안착하기 위한 삶속에서의 치열한 투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영원히 평행선을 달리는 것이 인간들일 수 밖에 없는 까닭에 우리의 생에서는 '사랑'과 '우정'이라 불리워지는 것들이 비로소 아름답게 느껴지고 투명하게 반짝이는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삶을 살면서 누구나 평행선을 한 번쯤 달려본 경험이 있다. 그렇기에 이 평행선을 달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체험적으로 인식하고 있고 그 평행선을 다시는 대면하지 않으려 편히 안착할 수 있는 지점을 모색하고는 한다. 그러나 이것은 보이지 않는 타인의 일방적 희생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역으로는 희생도 하지 않으면서 출발점에도 서 있지 않은 상대로 하여금 같이 달리자고 하는 것 역시 매우 무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공정한 판단과 결과를 기대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모두 같은 곳에서 출발할 수 있는 여건과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 누구에게도 상처는 공유될 수 없는 것이기에 공유하자고 얘기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의 관계가 평행선을 달리기 위한 여건과 환경이 저절로 주어지는 것도 아님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그 끝없는 평행선 속에서도 부단한 수신호를 주고 받아야 충돌하지 않고 교차할 수 있는 법인데 하물며 출발하기도 전에 그 머나먼 여정을 위한 준비가 소홀해서야 되겠는가. '너'는 '나'를 '나'는 '너'를 손질하고 닦는 작업이 충실해야 우리는 그제서야 가장 기본적인 관계의 출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뒤에는 전후좌우 모두 살펴가며 가속을 하면서 평행선을 달려 나가야 한다. 전후좌우는 '나'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평행선을 같이 달리고 있는 상대도 출발하기 전과 마찬가지로 맞대야 한다. 나보다 속도가 느린가 너보다 내가 속도가 빠른 것인가란 것도 점검해야 한다.


출발하기 전후 모두 우리는 평행선을 다시금 달릴 수 밖에 없음도 깊이 인식해야 한다. 평행선을 달리지도 않고 '사랑' 혹은 '우정'이 싹트는 것은 애당초 글른 일이 아닐 수 없다.


허나 나는 지금 평행선을 달리지 않고 있으면서 거짓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달리지 않는 평행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평행선 열차는 지금부터라도 관계를 싣고 다시 힘찬 기관소리를 뿜어야 한다.

.'죄스럽다. 내가 함께 달리지 않는 '너'와 '너희'에게... 진심으로..

2008. 8. 25.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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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라진 세월은 마치 고통의 조각을 사이에 둔 듯

먼지 낀 창틀을 통해 볼 수는 있지만 잡을 수 없었다.

 

그는 지나간 날들을 그리워 한다.

 

만일 그가 먼지 낀 창틀을 이겨낼 수 있다면

일찍이 사라져버린 그 세월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역주: 왜 번역자는 이렇게 직역을 하지 않았고 순서도 바꾸었을까 모르겠다.

내 생각에는 이렇게 직역을 하는 것이 더 엔딩씬에 어울리는 듯 싶다.

아마도 이렇게 직역한 사람은 내가 처음이지 않을까...

직역은 일면 딱딱해 보여도 더 많은 것을 내포할 수 있다.

사실 감정을 복기하려 했던 것인데

엔딩자막을 복기하고 말았다.

2008년 3월 15일 토요일 박명의 시간에 반복해 스치는 그 느낌을 뒤로 하며... 

2008. 8. 25. 05:27


"....... 의문을 갖지 말아라. 회의도 하지 말아라. 미래를 아는 인간은 아무도 없으며,

가망 없는 미래를 예상해서 현재의 삶에 불충실하는 것처럼 큰 어리석음은 없다.

공부에 열중해라."


출처: 조정래, 『한강 3』, p.29.

2008. 8. 25. 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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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얼음, 땡'이라는 놀이가 있었다.

술래를 정한 뒤 나머지 아이들이 모두 도망을 가다가

술래에게 잡히기 전에 '얼음'을 외치면 살아남고

다른 동무가 다가와 '땡'을 외치면 다시 움직일 수 있는 그런 놀이.

우리는 상처를 견딜 수 없을 때

스스로 '얼음'을 외친다.

그리고 그 누군가 다가와 '땡'을 외치기 이전에는

그 얼음의 지속력은 계속될 뿐이다.

나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땡'을 말하기 전에는 말이다.

자~ 맞춰봐. 내가 '얼음'인지, '땡'인지....

2008. 8. 25. 05:23

은희경 소설집,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中 발췌.

 

8

(전략) 별이야말로 인류의 가장 오래된 좌표이니까요. 좌표의 정의에 대해서는 다들 기억하시죠? '직선 위의 한 점 O를 원점으로 한, 임의의 점 P의 위치를 나타내는 수나 수의 쌍.' 수학시간에 배웠잖아요. 즉 'O를 원점으로 한 P의 좌표'말입니다. M은 언제나 좌표를 필요로 하는 타입이니 로키에서는 궁한 나머지 곰을 좌표로 삼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좌표를 과신하지는 마세요. 역사 이래 인류의 자표는 끊임없이 변화해왔으니까요. (중략) 할 수 없네요. M에게 다른 좌표를 찾아줘야 할 것 같아요. 상투적인 말이긴 해도 어쨌든 인생이란 길찾기이니까요. 늘 붙어다니는 친구들이 있다는 건 또다른 친구의 접근을 어렵게 만들죠. 그리고 늘 가는 길로만 간다면 우리의 역사적 사명인 진화는 언제 하냐구요. 오늘 제가 좀 수다스러웠나요? 사실 이제부터는 자주 글을 올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동안 잘 놀았고 돈도 대충 다 썼으니 다시 직장으로 기어들어갈 때가 된 거죠. 그리고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이제 머리가 차가워지는 가을이 되었으니까요. 지겹고 무더운 열대야가 연일 계속되다가 어느 새벽인가 문득 서늘한 바람을 느끼고 이불을 끌어당기는 순간 우리는 갑자기 가을이 왔다는 걸 깨닫게 되죠. 혹시 바로 그 순간 이렇게 중얼거리지는 않았나요? 아, 서른이 올 때처럼 가을도 갑자기 오는구나. 지금까지, 친사회적이고 낙천적인 4번 유형 B였습니다.


은희경, 「지도중독」,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서울: 창비, 2007), PP. 177~179.



9

B에게도 들려주지 않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중략) ----선배는 산에 자주 간다면서요? ----난 야생이 좋아. 뭐가 들어 있든지 알 수 없는 세계거든. 인간이라는 종만으로는 세상이 너무 뻔하잖아. 인간은 적응을 너무 잘 해서 재미가 없어. 적응만 하면 진화를 할 수가 없지.

----반항아가 진화에 유리하다는 건가요?

(중략)

----선배가 생각하는 진화란 게 뭐예요?

----모두들 다른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진화야. 인간들은 다르다는 것에 불안을 느끼고 자기와 다른 인간을 배척하게 돼 있어. 하지만 야생에서는 달라야만 서로 존중을 받지. 거기에서는 다르다는 것이 살아남는 방법이야. 사는 곳도 다르고 먹이도 다르고 천적도 다르고, 서로 다른 존재들만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거야.

----왜 그렇게 지도를 열심히 보세요?

P선배는 피식 웃었다.

----좌표 읽는 것은 내가 풀어본 중에 가장 쉬운 2차방정식이야.

원점 O가 확실하면 P의 위치는 구할 수 있는 법이거든.

----P의 위치가 구해지면 가야 할 방향이 보이겠죠?

----아니.

다음 순간 P선배의 얼굴에서 웃음이 걷혔다. 내 등 너머 어딘가 촛점을 맞추고 있었다.

----올바른 길이란 건 없어. 인간은 그저 찾아다녀야 할 뿐이야. (후략)


은희경, 「지도중독」,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서울: 창비, 2007), PP. 181~182.



10

휴가를 마치고 사람들이 도시로 돌아왔다. (중략) 학원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지난학기에 가출한 적이 있는 여학생이 나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성적이 안 올라서 고민이니? 그게 아니고요. 여학생은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선생님, 저 오늘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떡볶이 말고 술 사주시면 안돼요? 나는 약간 망설이다가 B의 블로그 주소를 알려주었다. 거기 들어가보면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있을지도 몰라. 내 친구가 올리는 글들이 일종의 지도라고 할 수 있거든. 집에서는 컴퓨터 못해요. 엄마가 인터넷 끊어놨어요. 그럼 엄마한테 술 사달라고 해. 여학생이 얼굴을 찡그렸다.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에요.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혼자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좀 걷고 싶은 날씨였다. 날카롭게 쏘아볼 뿐 여학생도 따라오지는 않았다. 늦은 밤 도시의 거리에는 텅 빈 채로 가을이 시작되고 있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모르겠다고? 서른이 넘었는데, 나도 아직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몰라. 바람이 서늘하고 간간이 별도 보였다.


은희경, 「지도중독」,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서울: 창비, 2007), PP. 182~183.

 

 

足 : 아.. 정말 나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여전히 모르겠다. 삼십대의 수확이라면 이제 더 나이가 들어도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계속 모를거란 사실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속적인 좌표설정과 좌표를 찾아 가기 위한 허무한 몸사위를 보일 것이다.

2008. 8. 25.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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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오면서 그리고 살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편향되지 않은 사고와 괜찮은 실력을 가진 연구자가 되겠다.

누군가에게는 깊은 신뢰와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될 것이다.

혹은 많은 부러움과 존경을 받는 훌륭한 사람은 되지 못할지언정

적어도 후회없는 내가 되겠다라고...

 

허나 앞으로 살아가면서 때로는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어쩌면  후회없는 내가 될 수 있더라도

결국 내가 아닌 내 주위를 지켜주는 사람들에게는

후회뿐인 '나'로 남을지도 모른다라고...

 

무엇을 주고받느냐의 문제가 아닌 해결되지 않을 역설.

2008. 8. 25. 05:18
2008-1학기 실라부스 reload
2008. 8. 25. 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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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http://oktimes.cafe24.com/ (사진관; 역시나 지난 번 업어온 선배님 홈페이지中)

그네는 영원히 죽지않는 태풍이었고

난 짙은 들꽃냄새에 혼미하게 취했던 벌이었다.

 

지나간 태풍을 부정할 이유는 없다.

어차피 지나갈 것이었고 보내야할 것이었다.

 

인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회한은 어찌할 수 없다.

오늘 밤을 견디면 괜찮다가 또 무참히 오늘같은 날이 찾아들 것이다.

 

그렇게 그렇게 반복을 거듭하면서

태풍이 지나간 자리를 오롯이 정리하는 일만 남았다.

그네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갈 것이라 믿는다.

 

우리 모쪼록 자율성을 가진 피노키오와 같이 살자.

 

나는 적어도 비루한 인텔리가 되지 않을게.

2008. 8. 25. 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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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한 가지 생각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장악하고 있다.

야외활동의 결핍으로 약간의 편두통이라는 부작용이 생겼지만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면서 작지만 커다란 일관성을 경작하고 있다.

 

사랑이 도트(.)이고 라인(line)이고 스페이스(space)라 한다면

무엇을 고를 것이냐고 지난 겨울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시 나는 무한하게 채워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던

스페이스를 선택했었다.

 

그런 뒤 세월이 흘렀다.

어느덧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는 사랑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편한 나이가 되어 버렸고

이제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좋을지도 아는 영악함도 생겼다.

 

나는 스페이스를 얼마나 아기자기하게 꾸미면서 살아왔을까 자문해 본다.

공간 속에는 어떤 것이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인가.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요소들...

 

그러나 아직은 슬퍼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적어도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사랑을 해왔던 것은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간들은 일방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선택한 결코 데데하지 않은 관계의 방점임도 알게 되었다.

 

또 한 가지의 작지만 즐거운 발견은

스페이스 안에서의 여행은 계속되고 있다는 것. 

여행은 순조롭지 않지만 여전히 즐거운 일이다.

 

다음 역에서 승차할 누군가를 기대한다는 것은

나와 너가 아닌 우리에 방점을 찍는다는 것은

아직 무모하지 않고 아프지 않은 추억이고 희망이라 믿는다.

2008. 8. 25. 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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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즐겨하던 게임이란 것들이

지역마다 그 게임의 명칭이나 방식이 다소 상이한 모습을 보이고는 있지만  

어렸을 적  우리가 자주 즐기던 게임  가운데 '땅따먹기 게임'이란 것이 있었다.

 

우선 커다란 사각형의 미개발 땅을 만든 뒤

각자 선택에 따라 위치를 정하고  손바닥 크기를 재어 자신의 땅을 분배받아

가위바위보로 돌을 튕기면서 미지의 세계로 진출하여 세 번 안에 자신의 영역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자신의 땅으로 만들 수 있는 게임으로 기억한다.

 

철이 없었을 때는 이 게임이 친구들과 참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게임이라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이 게임만큼 시작부터 불공정한 게임도 없는 듯 싶다.

몇 가지 실례를 들어보면 각자의 손바닥 크기가 분명 다름에 따라 처음 갖게 되는 땅의 크기,

돌을 튕기는 적절한 노하우만 있으면 얼마든 많은 땅을 차지할 수 있는 게임 방식,

이를 두고 혹자들은 자본의 속성을 이 게임만큼 잘 보여주는 것이 없다고도 이야기하고는 한다.

 

최대한 공정하게 시작할 수 있는 게임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가정한다면

모든 당사자들이 수긍할 수 있는 원칙과 방법을 게임 참여자들이 얼마나 합리적으로 논의하고 그 논의결과를

게임방식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느냐가 어떠한 게임참여에 대한 의미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흥미를 높여줄 것임이 틀림없다.

 

훌륭한 원칙과 틀이 잡혀있는 것과 더불어  게임과정에서는 합의과정 도출방식도 중요하다.

땅따먹기 게임에서는 곧잘 작은 돌맹이가 선을 넘어갔느냐 말았느냐로

갑론을박하며 게임이 중단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물론 땅따먹기 게임 자체로는 그 갑론을박도 흥미유발 요인 중 하나이겠지만....)

우리는 삶을 살면서 이 선을 넘었느냐 말았느냐의 문제를 가지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그 중에서는 의미있는 시간도 존재하지만 대체로 무의미한 쓸모없이 낭비되는 시간이 대부분일테다.

그리고 대부분 그 책임을 게임에 같이 참여한 상대방에게 돌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자.

그 책임이라는 것을 나와 상대방에게 얼마나 명확하게 규정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에 합의과정을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없다 한다면

앞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구조' 에서부터 출발이 잘못된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그 부분을 먼저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곧잘 자신의 인생에서 '처음부터 다시'라는 구호를 외친다.

스스로 새로운 에너지를 필요로 할 때 혹은 다시 시작하고 싶을 때 이 말을 애용하고는 하는데

정작 다른 사람과의 인간관계에선 이 말을 쓰지 않는다.

 

한편 어렸을 적 우리는 땅따먹기 게임 방식의 문제로 인해 게임 도중  서로 다툰다 하더라도

다음 날이 되면 모든 것을 깔끔히 잊고 처음부터 다시 게임을 시작하고는 한다.

저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아 게임의 상대방만 바꾸면 모든 게 해결될 것이라 생각하는

성인의 사고방식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국면을 절대 벗어날 수 없다.

 

처음부터, 그리고 어렸을 때로,

또한 땅따먹기가 목적이 아닌 게임 자체가 목적이었던 그 때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참된  관계를 쌓는다는 것은 사실 별게 아닌 듯 싶다.

정해놓은 금을 넘었느냐 말았느냐로 다투고

혹은 금을 넘지 않기 위해 애를 쓰기 보다는

한 번쯤은 상대와 나를 위해 금을 과감히 의도적으로 넘기는 일도 필수적일 것이다.

금은 넘어가라고 있는 것이다.

 

자아~ 맞춰 봐...

금을 넘어간 돌멩이는 네 돌맹이인가? 내 돌멩이인가?

2008. 8. 25.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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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반 고흐, 종달새가 있는 밀밭

 

얼마 전에 작고한 피천득 선생의 수필집 『因緣』을 보면 종달새와 관련된 글이 나온다.

  잠시 인용하자면 새장 안에 갇혀 있는 종달새라 할지라도

종달새는 푸른 숲, 파란 하늘, 여름 보리를 늘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아침 햇살이 내리쬐는 오전이면 종달새는 착각을 하고

문득 날려다가 날개를 파닥거리며 쓰러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설령 새장 속에서 태어나 아름다운 들판을 모르는 종달새라 할지라도

그의 핏속에는 선조 대대의 자유를 희구하는 정신과 위로 위로 지향하는 강한 본능이 흐리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鳥籠안에 갇혔을지언정 종달새는 종달새라는 것이다.

 

 

30대가 넘어서면서 세상의  비극적 현실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고,

그에 순응하는 법을 배워가기도 하고 또 타협하지 않으려는 의지의 발현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나'와 '우리'에게는 여전히 '내적인 젊음'이 존재한다는 반증이다.

따라서 아직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무한한 힘도 가지고 있다.

 어떤 방법론을 견지한 채 그 젊음의 비상을 견인해 낼 것인가는 각자의 몫이다.

그러나 궁극적인 지향점은 역시나 종달새의 비상처럼 '자유에 대한 추구'이어야 할 것이며,

한 가지 덧붙이자면

종달새는 외롭지만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는  언제든 함께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려  노력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와 '당신'은 모두 여전히 아름답고 아름답게 늙어갈 수도 있다.

 매번 새장에 부딪혀 지독한 상처가 난다 해도 새장이 열릴 때까지 함께 훨훨 날아보자.

2008. 8. 25.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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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으로 따진다면 30대에 접어든지도 벌써 3년차이다.

조금은 이르지만 내게 있어 30대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차분히 생각해 보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듯 싶다.


첫째, 어떤 인간으로 살아가야 할 지 제대로 된 인식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행위를 함에 있어 타인을 의식하게 되는 껍질을 깨고 나와

진정한 내면의 '나'와 만나게 되었다는 것은

지난 시공간에서 내가 만난 첫 축복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진심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았다는 것이다.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고

진심으로 사랑을 하고

진심으로 책을 대하고

진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

진심으로 살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랑받을 수도 없다.

껍데기를 보고 껍데기와 사랑을 할 수는 있을지언정.



30대는 아직 삼분의 일도 채 지나지 않았다.

이는 내가 깨달은 것이 삼분의 일에 지나지 않고

앞으로 노력 여하에 따라 삼분의 이를 얻을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진정으로 행복해진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행복해지고 싶다.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상처와 고뇌도 감당하리.

2008. 8. 25. 05:00

가끔 '꿈'이 뭐냐는 질문을 받는데 오늘 누군가 내게 그 질문을 했다.



만약 '꿈'이라는 것을 좀 더 큰 범주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면

내겐 딱히 정해진 '꿈'이란 것이 없다.



내 생각은 그렇다.

'꿈'이라는 걸 달성하는 순간 너무나 공허하지 않을까라는 생각.

그러나 나도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기에

역시 꿈이라는 게 없을리가 없다.

하지만 난 딱히 정해놓은 꿈이 없다.



다만 굳이 얘기해야 한다면

내 자신이 좀 더 나를 많이 사랑할 수 있도록,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만큼 타인을 사랑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삶을 사는 것이

나의 평생 숙원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를 위한 몇 가지 실천과제들이 존재할 뿐이다.



내가 하는 일을 보고 종종 사람들은 묻는다.

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냐고...

그럴 때마다 난 '후훗' 웃고 말거나 '교수'는 하늘이 내는 것이라고 얘기해주곤 한다.

물론 가르치는 일은 내가 생각하는 실천과제 중에서 첫 번째로 중요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이건 교수가 되지 않아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요즘은 성급히 내 자신을 제대로 닦지도 않은 상태에서 가르치고 싶어하는 욕망이

나를 종종 못살게 굴기도 하지만 조만간 그럴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난 딱히 정해둔 꿈이 없다.

그리고 꿈이라는 것을 잃지 않는 것이 더 큰 나의 꿈일 뿐이다.

방점을 어디에 찍느냐가 관건이다.

2008. 8. 25. 04:58

다른 팀들이 대부분 춘계 체육대회 겸 워크샵을 떠나 때아닌 한가로움을 맛보고 있다. 기압이 올라간 탓인지 자꾸 산만해지는 듯한 기분이라 잡문을 통해 집중을 좀 해볼까 한다.


동국대 강유원 철학박사가 펴낸  『몸으로 하는 공부』, (서울: 여름언덕, 2005)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1. "책을 읽지 않는 이유는, 아이건 어른이건, 글에 익숙해져 있기 않기 때문이다. 꾸욱 참고 앉아 진득하게 글을 읽는 일부터 해보자. 이런 점에서 글읽기는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다. 몸이 무거워지고 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해야 책이 손에 잡힌다. 책이 손에 잡혀야 새로운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이 모르는 게 무엇인지도 알게 된다.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순간이 바로 지식에의 열정이 시작되는 때이다." (18쪽)


2. "몸으로 겪어봐서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이론적으로 정리할 줄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경험과 이론 둘 다가 겸비되지 않으면 그것은 제대로 된 지식이라 하기 어렵다." (21쪽)


3. "사람들은 어떤 방식을 통해서건 뭘 배우고 알게 되며 그렇게 알게 된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진리는 아니다. 확실한 진리를 단박에 알아내는 방법이란 도무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뭘 안다'고 스스로 자부할 때에는 항상 '이것이 틀릴 수도 있다'는 의심을 스스로에게 제기해야 한다. 따라서 앎에 대한 참다운 자세를 가진 사람은 늘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이고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안다는 것'의 가장 중요한 의미이다. 아는 것을 안다고 말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요, 이런 사람을 우리는 주제파악이 잘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29쪽)


4. "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머리로 아는 것을 가리키는데 그것이 안다는 것의 전부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제대로 안다는 것은 사실 '할 줄 안다'는 것까지 포함한다. 머리로 익힌 것을 몸으로 해봐서 할 줄 아는 단계로까지 가야 어느 정도 앎의 완성에 접근해간 것이다. 이걸 흔히 '지행합일', 또는 '지행일치'라고 한다. (30쪽)



위의 글은 몸으로 하는 공부의 중요성, 그리고 그 진정한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가장 진지하게 대하게 되는 '사랑'이란 감정도 익숙치 않은 감정에 익숙해져 가는 과정이고 많은 참을성을 가져야 한다는 점에서는 몸으로 하는 공부나 몸으로 하는 사랑이나 다를바 없다. 한편 '사랑'이란 감정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그 감정의 폭과 깊이를 이성적으로 잘 정리해두어야 그 귀결에 관계없이 '사랑'을 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유익함을 안겨준다. 그러므로 사랑에 대해 진정성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과정 속에서 부단히 튀어나오는 '욕심'과 '집착'을 스스로 잘 구분해야 하고 '믿음', '양보', '배려'등의 감정을 상황에 따라 제대로 취사선택하는 노력도 요구된다.



요컨대 자신의 한계와 노정된 문제점을 깨닫고 시정할 수 있는 태도를 견지할 준비가 되어 있고 그 대상 역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을 때가 진정한 사랑의 열정이 꽃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매우 사변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이와같이 사랑도 공부와 마찬가지로 '감정', '이성', '몸'이 상호 유기적인 형태로 융합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평소 사랑을 지극히 감정적인 것으로만 치부하기 때문에 이런 상태에 이르기가 결코 쉽지 않다. 사랑은 몸으로 한없이 부딪히고 깨져서 얻는 상처에서 소중한 무엇인가를 재발견하는 과정을 거친다는 썩 위험하면서도 즐거움을 안겨준다. 이것이 인간이 사랑에 대한 도전을 결코 방기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가 아닐까 싶다.



허나 공부와 사랑(여기에서 사랑은 남녀간의 사랑으로 한정하자.)  모두 세상과 관계를 맺어간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할 수 있겠지만 사랑은 어디까지나 어느 한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때문에 공부보다는 더욱 더 세심한 노력이 요구되며 상대방의 소극적 내지 적극적 동의없이는 사랑을 준다는 것도 지극히 어렵게 되어버리고 만다. 사랑이 세상 다른 일보다 더 어렵다는 푸념들이 일상에서 흔히 목격되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다.  따라서 이 문턱을 뛰어넘지 못하게 되면 더이상 사랑은 초기단계에서 그 무엇도 아닌 것이 되는 것이고 무사히 뛰어넘을 수 있다면 사랑을 할 수 있는 본격적인 무대가 우리 앞에 펼쳐지게 된다. 그러나 정작 어려운 고비는 이 때부터이다. 상호 개방된 상태에서 한시라도 열린자세로 임하지 않는다면 결국 이별로서 그 파국을 맞게된다. 오랜동안 내밀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꽃피우게 되는 결과물들이 아름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지금 '사랑'을 하기 위해 몸을 제대로 쓰고 있는가? 혹여나 제대로 쓰지 않으면서 상대방과 가치관 등의 여타 다른 부분에 책임을 전가하고 있지는 않은지 곰곰이 따져봐야 한다. 제대로 된 사랑을 받는 것이 어려운 것도 따지고보면 이렇듯 사랑을 하는 방법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사랑이 상처뿐인 것으로 기억되는 것도 다 이로부터 비롯된다.  


 하지만 난 여전히 초보다.    

2008. 7. 15. 20:41

첫 학기를 마치면서 무엇보다 학생들이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였는지 알고 싶었기에 과목취지에 벗어나는 일이란 걸 뻔히 알면서 서술형 '강의평가'를 기말고사의 한 문제로 출제하였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읽으면서 대학 4학년이라 하기에 수없이 틀리는 맞춤법과 일관성이 떨어지는 문장이 꽤나 많아 눈에 거슬렸다. 하지만 솔직하고 자유롭게 기술하라 요구했기에 내겐 더할나위없이 소중한 답변들이었다.


 아래 요약글에 강의평가 전문을 옮기느라 5시간 조금 넘게 워드를 치면서 다시금 내렸던 결론은  첫 학기 정규 전공수업이라는 것과 내 전공에서 다소 벗어나는 생소할 수 밖에 없는 과목이라는 점을 충분히 감안한다 하더라도 일단 '실패한 수업'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학생들의 강의평가 내용 중 '좋다'라는 의견이 반을 차지하지만 실명으로 기재했기에 나로서는 50%는 감해서 접수해야 하는 것일테고, 게다가 그 '좋다'의 의미는 수업 외적인 측면에 대한 선호가 분명하였다. (가장 컸던것이 물론 천문대로 별보러 갔다가 삼겹살 먹었던 것이니..) 그러니 수업내용만 놓고 봤을 때는 한 마디로 내용이 별로 없는 수업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요즘 유행하는 유사하지 못한 표현으로 '소통에는 성공하였으되, 경제발전은 이룩하지 못한 대통령'이었다라고 하면 이해가 좀 더 쉽지 않을까 싶다.


첫학기 강의라 중간중간 일관성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고, 생소함은 나 역시 느꼈던 부분이라 여기저기에서 혼선이 빚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일정부분 학생들의 입맛에 가급적 맞춰주려 했던 것이 오히려 '실패'를 부른 원인이기도 한 듯 싶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학생들이 좀 더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분위기를 조성해주면 거기에 상응하는 행위를 할까 싶었다. 그것이 강의를 하는 사람에 대한 학생들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일텐데 사실 학생들은 내 본래의 의도에 부합하는 행동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물론 표현을 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에 부합하는 행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반문이 나올 수 있겠지만...어쨌든 수업에 있어서 가장 큰 책임은 내게로 돌아와야 하는 것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미시적으로 지적된 몇 가지 사항에 대해서 잠시 언급하자면(학생들을 비판하고자 함이 절대 아니니 오해말라)

첫째, 조별발표 문제 :

조별발표의 취지는 어느 정도의 수준과 선에서 구성원들간의 합의과정을 경험하면서, 서로 양보하고 돕는 그런 이상적인 형태를 선생입장에서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에 반해 결과적으로 '나만 손해본다'라는 불만이 터져 나온다는 것은 역시 조별발표는 쉽지 않은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학생들이 앞으로 사회에 나가서  어떻게하면 개인간의 갈등을 조정해 나갈 수 있는지, 그리고 함께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번 기회를 통해 깨달았으면 했는데 역시나 쉬운 문제는 아니다.


둘째, 시를 외우거나 중국과 관련이 없는 영화를 봤던 문제 :

어린 학생들이 아니더라도 '사람은 참으로 이중적이다'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었다. 내 원래의 의도는 학생들이 스스로 발표에 대한 중압감과 또 과제에 대한 어려움을 위로하기 위한 중간단계의 보상책이 영화감상이었다. 인터넷과 중국어라는 과목 취지를 살리자면 엄밀히 '영화를 보면 안된다'라는 얘기가 평가에서 나왔어야 적확한 것이다. 그런데 학생들은 영화 보면서 1주의 수업을 편한 마음으로 보내는 것은 좋은데 중국영화가 아니라서 문제였다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모순된 언행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기말고사를 마음 편하게 봤으면 좋겠다라 해서 그런 차원에서 삶에 대한 관조가 가능한 詩를 선택했었는데 결과는 역시 영화선택과 유사한 모순된 반응이 나온 것이다.


셋째, 자유로운 분위기는 좋았지만 수업과 관련이 없는 인터넷을 하며 수업이 다소 산만해졌다는 문제 :

만약 처음에 어떤 통제의 수단을 가했더라면 절대 수업의 분위기는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나는 학생들이 무엇을 하든지 학생 스스로의 자율규제를 원했다. (2MB정부의 엉터리 쇠고기 민간자율규제 따위를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ㅡ.ㅡ) 그랬기에 발표수업 중간중간 인터넷 아이쇼핑을 한다든가, 싸이를 한다던가, 뉴스를 본다던가 해도 '재미있어?'라고 하며 넘어가곤 했던 것이다. 운용과정에 있어 학생들로 하여금 집중이 되지 않도록 한 점은 100% 나의 책임으로 돌려야 할 것 같다. 그러나 학생들 역시 자신의 발표를 성심껏 들어주길 원하면서 타인의 발표시 여지없이 딴짓을 한다는 것은 역시 참여형 수업에 저해가 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이 글을 올리는 목적은 학생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하고 또 객관적인 반성을 통해 다음 강의에 반영하겠다는 내 의지, 학생들에게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강의평가를 했을까를 보면서 수업전반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공유와 기회제공, 선생으로서 학생들의 세부적인 평가의 일부분에서 나타나는 모순에 대한 건전한 비판,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학기 강의를 통해 생긴 '우리의 友誼'를 위해서이다.


글이란 것이 때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오독하게 하는 경우가 꽤나 많아 요즘은 글쓰기도 망설여진다. 요컨대 스스로의 변명과 학생들에 대한 비판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 마지막을 함께 정리하며 '유종의 미'를 거두자는 차원임을 다시금 밝히며 강의평가 전문을 타이핑하여 아래 파란색으로 된 요약글에 옮기니(클릭하면 내용을 볼 수 있다.) 많은 학생들의 적극적인 관심을 바란다.


그밖에 실수하고 무심했던 부분들 모두, 진심으로 학생들에게 미안하다라는 표현에 그치지 않고 더 나은 모습을 위해 매진하겠다.


참고로, 숫자 1~15번까지는 주간반의 강의평가이고, 16번~37번까지는 야간반의 강의평가를 정리한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의 맞춤법이나 표현은 수정하지 않고 원문 그대로 올렸음을 밝혀둔다. 그리고 현재 각 강의평가에 대한 짧은 코멘트를 달고 있는 중이니 코멘트가 달려있지 않은 사람은 아직 내가 미처 달지 못한 것이니 널리 양해해주라. 추후에 오타나 맞춤법을 수정해 줄 시간이 있다면 빨간색으로 수정하여 업데이트하도록 하겠다.

 


2008. 7. 15. 20:36

한 주가 또 지나간다. 날씨도 꾸물꾸물하고 해서 저녁에 반주 한 잔하고 일찍 들어왔다. 책을 읽을까 했는데 오후부터 증상이 있던 두통이 쉬이 가라앉지 않아 그만두기로 했다. 요즘은 몸의 기능들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건 같지 않다. 아무래도 담배를 잠시(?) 끊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여튼 쉬는 겸  오늘 보기로 예정했던 일본영화 '녹차의 맛'을 보기 전에 예전에 잠깐 생각을 정리해두었던 것에 대해 얘기해볼까 한다.


그야말로 '나쁜 남자(여자포함, 이하 통칭 남자)와 연애지침서의 시대'라 할 만하다.  삶을 살아가다보면 사실 남녀간의 연애이야기만큼 알콩달콩하고 재미있는 이야기거리가 없다. 학교, 직장 등 모든 곳에서 미혼남녀들을 대할 때는 이 얘기가 끊임없이 나온다. 물론 나이먹어가는 나같은 사람들은 스트레스이지만 나 역시 연애상담 혹은 연애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특히나 요즘같이 관심이 넘쳐나는 때는 말할 필요도 없겠다.


인터넷상에는 늘 연애와 관련된 정보들이 넘쳐난다. 물론 정말 진지한 이야기들은 오프라인을 통해 공유되고는 하지만 익명을 바탕으로 한 인터넷상에서도 연애 관련 이야기들은 흥미있는 서핑거리이기도 하다.  특히 현대의 한국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 남녀들에게 가장 화두가 되는 것을 꼽자면 '나쁜남자(여자)'가 되자'라는 것과 각종 '연애지침서'라고 할 수 있겠다. 


나쁜남자는 곧 연애에도 소위 신비함과 쿨함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으로 압축되는데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절대적 '이성'이 아닐까 싶다. 상대방에게 나를 너무 드러내서도 안되고, 감정표현도 쉽사리 하지 않는다. 그리고 흔히들 말하는 잘난 남자로서의 조건도 갖추는 것은 필수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자신의 생활중심을 절대 벗어나지 않고 한 사람에게만 매달리지도 않는듯한 여유로운 쿨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이성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빠진 사람들은 반면 지극히 감정적이고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으로 흔히 묘사되곤 한다. 아마도 이런 양태들은 구질구질한 감정보다는 번뜩이는 이성이 연애에서도 상부구조를 차지해야 연애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다.


또한 홍수를 이루고 있는 각종 연애관련 지침과 정보들은 어떠한가? 동시에 사랑이 시작되거나 사랑에 갈등요소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런 정보들은 사실 세상에 나올 이유가 없다. 그러나 동시에 스파크가 튀는 사랑이 어디 흔한가? 특히 나이가 먹을수록 상대방을 경계하고 나를 보호하려는 움직임은 극히 자연스런 현상으로 자리잡는다. 그렇기에 먼저 사랑하게 되거나 혹은 연애과정 속에서 각종 문제가 불거져 나올 때 더 사랑하는 사람들은 오늘도 술병을 부여잡고 친구 혹은 선후배들을 괴롭히는 만행을 저질러대고 있을테고, 혹은 지금 이순간 열나게 자판을 튕겨가며 온갖 감상에 젖어 절절한 호소를 불특정 다수들에게 하고 있을게 틀림없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다. -.-)


살다보면 진심을 다해도 이루지 못하는 헛된 짝사랑들이 수없이 일어나고 사귀는 사이에도 둘만의 각종 심각한 문제들로 갈등을 겪다가 급기야 이별하는 일까지 허다하게 발생한다.   게다가 과거의 애잔한 상처들을 보유하고 있는 남녀들은 더욱 그렇다. 그래서 마음 주지 않아도 만날 수 있고 외로움을 해결할 수 있는 일회성 만남들이 점점 더 판을 치고 있다. 소위 데이트메이트 뭐 이딴 것들도 다 그런 현상의 아류작들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연애는 어려운 것일까?  나도 이 시대를 같이 부여잡고 살아가는 미혼으로 이 문제에 대해 적지않은 고민과 갈등으로 수많은 밤을 새며 강소주를 들이킨 바 있고, 또 되풀이할 것이라 생각된다. 내가 핵심을 잘 집어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핵심은 '손해보기 싫어하는 마음'이다. '나쁜 남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도 또 우리들이 낮이면 낮, 밤이면 밤마다 각종 연애지침서들을 찾아 헤매는 것도 결국 '내가 좀 더 손해보는 것은 싫다'는 것 때문이다. 이 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의 과정을 좀 더 수월하게 통과하려는 마음인 것이다. 사실 연애당사자가 되거나 짝사랑의 고통을 한 번쯤 겪어 본 이들이라면야 이런 과정을 다시 겪는다는 것이 싫을 수 밖에 없다. 좀 더 편히 가고 싶은 인간의 마음 나도 심히 동감한다. (나도 편히 가고 싶다.ㅜ.ㅜ)


난 서른 세해를 살아오면서 적지않은 여자를 만나왔지만 아직 제대로 된 '나쁜 남자'의 테크닉도 섭렵(?)하지도 못한 쑥맥이다. 그야말로 시대정신에 부응하지 못하는 한심한 부류중의 한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각종 연애지침서들을 안 찾아봤다고 할 수도 없다. -.- (실은 많이  봤다.;;) 때로는 나도 '나쁜남자'가 되고 싶고 각종 연애지침들을 온몸으로 승화하여 그야말로 '바람'같은 남자가 되고 싶다.  그러기엔 너무 늙었다.


어쨌든 반은 진심 반은 농담이고....


그러나 난 단연코 '나쁜남자'와 '연애지침서'를 따라 시대에 편승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결코 다시는 겪고싶지 않은 오장육부가 끊어지는 실연의 고통, 또는 짝사랑의 고통, 갈등의 고통이 재현된다 하더라도 난 그 길을 당당히 걸어갈 것이다. 사랑은 좁게는 한 개인, 넓게는 두 개인에게 있어 항상 새롭고 특수한 상황의 발생일 뿐이다. 열 번을 연애를 하든, 백 번을 연애를 하든지 간에 이 세상 모든 연애 당사자들에게는 언제나 같은 상황과 같은 해결책은 존재할 수 없다. 보편적인 것은 그래도 존재한다라고 주장들은 하지만 연애에서는 절대보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연애 혹은 사랑에서 절대적 진리로 삼는 것이 있다면   '믿음', '양보', '정체성(주체성)' 이 세 가지이다. 상대방과 자신에 대한 '믿음', 먼저 손해볼 수 없다는 마음의 타파과정인 '양보', 그리고 자기 사랑에 대한 굳건한 정체성(집착과는 다른 것)만 있다면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특히나 이 중에서 내가 가장 으뜸으로 치는 것은 믿음이나 양보보다는 정체성이다. 자신의 사랑에 대한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확고한 신념체계가 없다면 그 어려운 '우리'의 길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난 내가 사랑을 접을 때 이 점을 가장 깊이 고민하는 편이다. 큰 믿음은 약속을 하지 않는 법이다. 특히나 자신과의 약속은 더더욱 그렇다. 사랑을 시작할 때 마음 먹었던 자신에 대한 일관성을 지키지 못하고 시류에 편승하는 행태는 더이상 '아름다운 사랑'일 수 없다. 나는 '아름다운 사랑'을 할 수 없다면 차라리 내가 먼저 내 사랑에 비수를 꽂겠다. 난 사랑하는데도 바쁜 시간에 '나쁜남자'나 '연애지침서'에 솔깃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항상  능력부족이다.-_-;)


길게 씨부렁댔지만 나의 요점은 단 하나이다. "연애에도 역시 왕도는 없다. 나의 길을 가자." 라는 것이다. 나를 잃지 않고 너를 잃지 않게 하는 미덕을 사랑에서도 발휘한다면 언젠가 나에게도 "난 착한 당신이 좋아."라고 얘기해 주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까?


그리고 늘 하고 싶었던 이야기인데  자신이 능동적으로 사랑을 시작했다면 끝났을 때에는 젠장맞을 그 넘의 원망과 미움따위는 좀 날려버리자. 이별의 슬픔 그딴 거 결국 잊기 위해서는 나보다는 상대방에게 전가하는 것이 마음 편하다라는 것 나도 안다. 근본적으로 증오의 대상과 감정을 잘못 상정한 상황에서 결과적으로 그게  자기 상처 치유에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되었던가 묻고 싶다. 요컨대 자기 사랑에 누워서 침뱉는 행위는 하지 말자라는 것이다.  


바뜨...오늘 밤 자고 나면 나도 여지없는 변덕쟁이가 될 예정이다. 왜냐면 오늘은 비가 온 날이니까...끄읕.

2008. 7. 15. 20:34

지난 몇 일간 사회는 '한미 FTA'체결과 관련하여 그 뜨거운 찬반 양론은 극에 달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성급한 FTA 체결에 반대해 온 입장이었지만 여튼 타결쪽으로 가닥이 잡힌 것으로 보도가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사실 난 이번에 도출된 세부적인 현안 결과에 대해 아직 본격적인 판단은 해보지 못했다. 하지만 보지 않아도 매체는 지금쯤 온통 경제적인 실익과 관련된 뉴스들을 인터넷 공간에 수없이 뿌려대고 있을 것이다. 난 개인적인 문제로 최근 꾸준히 불면의 밤을 보냈지만 특히 어젯밤 난 오장육부가 끊어질 듯한 고통에 일분일초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내 자아의 고통이 음식물 섭취에 얼마나 해로운지 오늘 식사를 하면서 오랜만에 다시금 깨달았다. 이런 상황이 도래할 것임을 뻔히 알아서 어제 미리 휴가도 냈었다. 그야말로 몸도 마음도 많이 지친 상태라 하루 쉬고 싶었던 것을 오늘 단행한 것이다.



그런데 멍하니 TV뉴스를 보면서 일면 부끄럽기도 했다. 지금까지 학문에 있어서 '가치중립'을 나의 테제로 삼아오면서도 이런 중대한 사회적 이슈에 관심조차 기울일 수 없게 되어버린 나의 이기적인 모습때문이리라.



난 지금 멍하고 뚱한 나약한 인간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조심스레 꺼내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결과적으로 FTA는 가닥이 잡혔다. 향후 많은 의사일정과 과정들이 남았지만 이제 우리에게 '경제적 실익''반대급부'는 더 이상 논쟁의 대상이 아닌 '현실'이다. 이로 인해 앞으로 우리사회는 수많은 '너'와 '나'가 치열한 싸움을 벌일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또한 대안없는 전지구적 자본주의는 우리를 틀림없이 안락하게 그 싸움터로 당당히 인도할 것이다.  



경제적 발전과 선진국 진입, 그리고 사회양극화와 같은 문제의 심화는 막을 수 없는 필연이다. 정작 내가 진심으로 안타깝고 서러운 것은 이 치열한 전쟁 속에서 별다른 변수가 발생하지 않는 한 우리사회의 수많은 '너'와 '나'는 결국 '우리'로 남지 못하고 돌이킬 수 없는 평행선을 달릴 것 같다는 예감 때문이다. 내 개인적인 신상과 연결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내가 불면으로 수많은 밤을 지새우는 것처럼 당분간 사회도 불면의 밤에 진입할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한미FTA는 타결이라도 되었으니 나보다 입장이 나은 것인가? 훗...  

2008. 7. 15. 20:32

사랑이란 단어에 담겨진 여러가지 의미 가운데 중요한 두 가지 '有'가 있다.


'소유(所有)'와 '공유(共有)'


두 가지 단어의 차이는 공유자가 물건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것 이외에는


공유자 상호간에 단체적 구속이 없고 개인적 색채가 강하다는 점에서 소유와 구별된다.


언뜻 둘 사이에는 이처럼 명확한 구분이 있어 보이지만


사실 두 단어는 有라는 공통된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가끔 우리가 현실화하는 사랑에서 이 두 가지가 서로 구별없이


혼합되어 사용됨을 목격하게 된다.


물론 정작 문제는 '소유'를 '공유'하는 것이라 착각하는 것에서 시작되지만 말이다.


뻔한 생각이 문득 드는 밤이다.


"사랑은 이 '공유'란 룰이 깨져 버리는 순간 더이상 유의미하지 않음을..."


때문에 사랑도 일종의 계약이 아닐까 싶다.


이 생각에 미치니 '사랑'이란 단어가 무척이나 가볍게 다가온다.

2008. 7. 15. 20:31

우중충한 날씨에 비생산적인 장시간 회의까지 겹친 날이라 그런지 컨디션이 좋지 않다.

대부분의 회사원들이 그렇겠지만 사무실에서는 보통 슬러퍼를 신게 된다.

일을 하다보면 화장실 혹은 5, 7, 9층을 왕복할 일이 생기는데

오늘 유난히 슬리퍼에서 '딸그닥' 소리가 나길래 봤더니

밑창이 너덜너덜해져 더 이상 신을만큼 없게 되었다.

 

 

 

이미 몇 일전부터 그렇게 나간 것 같은데 눈치도 없는 놈은

그것도 모르고 있었던게다.

비록 1년 전쯤 사무실 앞 피맛골 생선구이 골목 앞에서

5,000원 주고 저렴하게 구입한 것이라도

너덜거리는 슬리퍼를 보니 뜬금없게 '불쌍한 놈'이란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급한 마음에 스테이플로 찍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내일이라도 당장 사야겠지만 '슬리퍼'를 쉽게 버릴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무엇때문이었을까?

폐기처분되어 버린 사물에 대한 연민이었을까?

아니면 그래도 상시 내 곁에 있던 사물에 대한 섭섭함일까?






우리는 살다보면 우리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물', '동물', '식물' 등등의 것에

무한한 애정을 쏟아붓게 되는 순간이 있다.

아마도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로 일방적 행위가 가능하기 때문이리라.

대상의 의견을 들을 필요도 없이 내 멋대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구조가

우리를 그리도 관대한 사람으로 변하게 하는 듯 하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는 늘 그렇지 못하다.

흔히 '관계'가 깨졌을 때 내 탓보다는 상대방의 탓을 하기 일쑤이고

'통'하지 않음은 어쩔 수 없는 한계라 치부해 버리곤 한다.

요컨대 인간관계에서 내 '탓'이 아닌 경우가 즐비한 것이다.

 

 

 

가령 귀여운 강아지처럼 '멍멍' 짖으며 쳐다 보기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늘 내가 슬리퍼를 대했던 마음과 같은 마음이 들지도 모르겠다.

 

 

 

한편 우리는 끊임없이 실망하고 절망하면서도

결국 다시 '사람'으로 치료받으려 하는 연유는

그저 '나눌' 사람이 필요해서일까?

 

 

 

우리는 일상 속에서 '나누는 것'과 '사랑'을 얼마나 생산적으로 구분하고 있을까?

'나누는 것'과 '사랑'은 분명 다른 경지의 것이다.

'나누는 것'은 곧잘

내가 갖고자 하는 부분을 상대에게서 취하게 됨으로 일방적으로 종결되는데 비해

'사랑'은 그런 경지를 일찌감치 뛰어넘는 것이리라.

그래서 사랑을 끊임없이 갈구하게 되지만

결국 대부분의 '사랑'이라 일컬어지는 것들은 '나누는 것'에 그칠 뿐이다.

 

 

 

이런 측면에서 나눈다는 것은 무척이나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행위인 셈이다.

늘 자신만이 상처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임을 상정할 때

이러한 행위는 일상 속에서 너무나 쉽게 용인되고 묵인되어 버린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만(?) 있다.

'사랑'이란 감정의 생성과 교류는

부단한 이해와 양보의 과정임을...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상대방에 대한 '입장의 동일함'이란 것을...

 






머리 좋은 사람은 가슴 좋은 사람만 못하고

가슴 좋은 사람은 손 좋은 사람보다 못하고

손 좋은 사람은 발 좋은 사람보다 못하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하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이다.

 

- 신영복 선생의 '관계의 최고형태' 中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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