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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8. 25. 05:56

지난 밤, 당분간 같이 지내고 있는 친구를 호출해 같은 버스에서 만나 늦은 귀가를 하던 중에 출출하다는 의견의 합의에 따라 옆 동네 경희대 부근에서 하차하여 참치집을 찾아 들어가 배도 채우고 주님 1병씩을 격파하고 들어와 잠이 들었다. 그래서 모처럼의 숙취로 인한 갈증 때문에 채 박명의 시간에 일어나게 되었다. 생수를 벌컥벌컥 마시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지만 누우면서 떠오른 생각 탓이었는지, 아니면 연가를 내면서까지 해야 할 가족의 일 처리가 있다는 압박감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컴퓨터를 켜고 포스트를 쓰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사실 생활에 있어 권력관계의 일을 고백한다는 것은 나 자신까지 까발리는 일이기에 글로 옮기기는 쉽지 않지만 오늘은 이 얘기를 털어놓을까 한다.


사전 이해를 돕기 위해 우선 내 전공에 대한 얘기를 하겠다. 내 학부전공은 ‘중국어’이고, 석사부터의 전공은 이른바 중국학(이 학문의 범위를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잠시 설명을 하자면 한국에 있어서 ‘지역학’은 한 지역의 현대 정치, 경제, 사회문화를 포괄적으로 공부하는데 그 가운데에서 세부전공으로 ‘중국정치’방면으로 공부를 하고 있음을 밝혀둔다.)이다. (어문학 쪽으로는 영 소질이 없었고, 뒤늦게 사회과학 방면에 눈을 뜨게 된 것이라 이렇게 되었다. 아울러 학부는 대전의 지방 국립대를 졸업하였고, 대학원부터는 서울의 이문동에 위치한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음도 밝혀둔다.)


각설하고, 박사과정 진학과 동시에 현재 몸을 담고 있는 위원회에 들어와 경제적 생활을 돌보면서 어렵지 않게 작년 1학기가 시작되기 전, 3학기를 마치고 수료를 남겨두면서 생각했던 계획에 따라 휴학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아는 사람은 다 알다시피 올해 초, 석사과정 이후의 세부전공에서 다소 벗어난 어학 방면으로 첫 강사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지금부터 떠드는 이야기는 바로 이 강사생활 시작과 관련된 몇 가지 비하인드 스토리라고 할 수 있겠다. 아직 숙취로 인해 두통이 좀 있어 이야기를 잘 풀어갈 수 있을지, 또한 지금부터 한 시간 이내에 관련된 이야기를 끝마칠 수 있을지 약간 우려되는 바가 있지만 이어서라도 계속 쓸 생각이기 때문에 중간에 삼천포로 수시로 빠지는 것에 대해 양해를 좀 해주셨으면 한다.


환언하여 작년 휴학을 하면서 나는 직장생활로 소홀해진 공부에 대한 자극이 스스로 요구되었다는 점, 서른셋이라는 나이면 될테지라는 세속적인 이유, 답답한 직장생활의 탈출구가 필요했다라는 점, 학생들을 하루빨리 만나고 싶다라는 순수한 동기 등 여러 가지 이유에서 강사생활 시작에 대한 집착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의 대학 시간강사는 기본적으로 모교를 중심으로 첫 시작을 하게 되는 것이고, 그와 관련된 학회에서의 정치적(?) 활동, 그리고 학번에 따른 서열과 아울러 대학 전임교수들 간의 이해관계 등 여러 가지 제반사항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면서 강의하는 학교의 외연을 확장하게 되는 것이 전공에 관계없는 전반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모교에서 스타트를 끊지 못한다면 연구자로서나 강사로서 이 바닥에서 제대로 생활을 영위하기에는 애초에 글러먹는 시스템이 바로 한국적 시스템이기에, 그런 관습에 의거하여 나 역시 모교에서 스타트를 끊어야 하는 처지였던 것이다. 그래서 첫 시작은 전적으로 스승들의 배려와 하사에 의해 이루어지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그 시스템을 깨려는 행위는 어떠한 의미에서는 이적행위 아니 어쩌면 전복행위에 더 가까운 일이 될 수 있다.


어찌됐든 나는 위에서 언급했던 강사생활에 대한 욕구로 인해 스승이 생각났을 때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강의가 아닌 모교의 문을 인위적으로 두드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또 거만하게도 모교의 전공에서 내가 첫 학번이라는 점, 중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동기 녀석 둘을 포함해 가장 먼저 석박사과정에 진입한 선구적인(?) 케이스라 이 정도면 당연한 대접이라 생각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서울권 메이저대학의 경우는 이와 다르게 위에 먼저 공부를 시작한 선배들이 줄을 서 있는지라 이른 나이에 모교에서 강사를 한다는 것은 조교를 한다거나 모종의 사유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서열이 떨어지는 타대학이나 지방대학에서 시작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어쩌면 강사로서 우위적인 위치에 서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역시나 염려했던 대로 본론은 시작도 못하면서 이야기를 질질 끌어가고 있음이 선명해진다.  모교에는 현재 6명의 전임이 있는데 그 중 다섯 분은 모두 스승이고, 석사시절 생활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대전에 내려갔을 때 2년간 국립대 조교로서 일할 수 있는 배려를 해주기도 하였다. 국립대 조교는 계약직이긴 해도 대체로 공무원 7급에 해당하는 대우를 받는데다 교육직렬이라 일반직 공무원이나 사립대학 조교, 그리고 웬만한 시간강사는 따라잡을 수 없는 정도의 보수를 받는다. 지금은 내가 그만 둔지도 4년이 넘어 정확히 산출할 수는 없지만 석사학위 이수 등 약간의 경력을 인정받는다면 이런저런 수당을 합쳐 적어도 세전 3,200 이상의 보수를 받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런 고액연봉의 조교를 한다는 것은 전국적으로 통틀어 얼마 되지 않는 까닭에 나는 당시의 어려운 민생을 2년간 해결할 수 있었고, 이후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에 들어오게 되었던 간접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던 터라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기실 스승들에게 엎드려 절이라도 해야 하는 입장이다.


아무튼 나는 작년 1학기 어느 날에 대전행을 감행하게 되었다. 모교의 경우 한 분을 제외한 4명의 전임이 연배로 40대인데, 그 중에서도 7살 차이의 술자리도 종종 같이 하는 가장 친한 스승을 제외한 당시 학과장을 맡고 있던 사람을 찾아가서 이제 강의를 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하게 된다. 물론 일언지하에 거절당한다. 지나고 생각해보면 얼마나 내가 선생에게 우습게 보였을까란 생각에 웃음이 난다. 메이저대학 출신의 똑똑한 두뇌를 가지지도 못한 내가 스승이 먼저 강의를 맡지 않겠냐고 제안을 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먼저 찾아가 강의를 주셨으면 한다라고 했으니 얼마나 기도 차지 않는 일이 되었겠는가. 물론 당시 직접적인 거절의 의사보다는 공부를 우선 다 마쳐야 하지 않겠냐는 간접적인 표현을 듣기는 했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사실 직접적인 거절의사보다 더 마음이 좋지 못했다.


그렇게 씁쓸하게 서울에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장 친하다는 선생님과 술자리를 하게 되면서 강의를 맡게 되는 자격에 대한 입씨름을 하게 되었다. 그 선생님의 논리는 대학 시간강사도 이제는 원칙적으로 ‘박사취득 이상의 자’라는 것이었는데 그 말에 나는 기분이 많이 상해 이렇게 대꾸했었다.


“그럼 선생님들의 모교에서 오는 박사과정 1학기를 겨우 마친 후배들의 경우는 뭐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나는 이와 같이 당시 제자라는 이유와 더불어 모교 전임들 간의 권력관계 등에 의해 강사로 첫 발을 내딛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항의가 있었던 탓이었는지 올해 1학기 특정 과목을 맡았던 시간강사 선생님이 모 대학 전임으로 가게 되면서 그 자리를 메꿀 수가 있었는데 강의가 배정된 것은 아직 젊기 때문에 그 과목을 가장 효율적으로 가르칠 수 있고,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좋은 자극을 줄 수 있으며, 갑자기 다른 강사를 구하기도 힘들다는 등의 사유를 적은 내용으로, 해가 바뀌면서 새 학과장이 된 그 친한 스승님의 타 교수들에 대한 이메일을 통한 의견 조회가 이루어지면서 이전의 스스로 조성한 어수선한 상황이 비교적 수월하게 정리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한 학기 강의를 마쳤고, 학생들에 대한 미안함과 진실로 노력하지 못했음에 부끄러움만 남게 되었지만 그래도 다음에는 좀 더  잘해보자는 마음을 먹게 되었는데 그 동기는 지난 5월 무렵 어느 지인의 결혼식에 갔을 때 잠시 뵙게 되었던 바로 그 추천해주신 분을 만나 다음 학기 안식년을 떠나는 선생님의 강의과목 중 하나인 시사중국어를 맡기겠다라는 얘기를 직접 들은 것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적어도 난 확정적이진 않더라도 추진해보겠다라는 이야기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한 학기가 마무리될 무렵이면 다음학기 강의시간표가 짜여지면서 대략의 강사진도 꾸려지는 것이 기본적인 틀이었고, 기본적으로 타지에서 오는 강사에게 요일을 정하는 선택권을 주는 비교적 민주적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사중국어는 강사가 미정인 채로 금요일로 편성된 것을 알게 되었다. 조교에게 문의한 결과 눈치로는 강사가 정해졌다라고만 하는데 그게 나인지 다른 사람인지 전혀 짐작을 할 수 없었다. 만약 나를 감안한 것이었다면 사전에 직장을 다니는 내게 편의를 제공하는 차원에서 언질이 있었을 터인데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을 감안한다면 현재 상황은 지극히 불투명한 것이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의사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오해가 일정하게 있을 수 있겠지만은...

 

여기까지가 지루하게도 사전 정황에 대한 설명이다. 사실 장광설인 서론에 비하면 말하고 싶은 본론은 그리 길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진즉 대학원에 들어가겠다라는 생각을 하면서부터 끝까지 한 번 가보겠다라는 마음이었고, 또 시간강사로 생활을 영위한다는 것이 결코 녹록한 일이 되지 않을 것도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와 관련된 어느 정도의 고초와 부조리는 견디겠다라는 마음가짐은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막상 그런 상황에 진입하고 보니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알겠다.

 

이는 단순히 강의 하나를 연장해서 맡으면서 강사 타이틀을 유지하겠다라는 욕심보다는 스승들에 대한 인간적인 섭섭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스로 견지하려고 하는 원칙에 대한 원론적인 문제제기가 더 크다고 할 수 있겠다.

 

괴테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인간은 보이는 대로 대접하면 결국 그보다 못한 사람을 만들지만, 잠재력대로 대접하면  그보다 큰 사람이 된다' 내 생각에는 지금 나를 길러낸 스승들이 나를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대로 대접하고 있다라는 결론에 이르고 있고, 또 무엇보다도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런 일련의 상황들이 진리를 규명하고 좀 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를 하고 싶다는 나의 원칙을 느슨한 상태라도 해체하고 파괴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기적인 수입이 있는 상황에서 굳이 이런 모험까지 감행했던 것이 전적인 나의 책임으로 돌아와야 할테고 또 책을 읽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한 판에 학계의 부조리한 권력구조 속으로 미리부터 편입되어 들어가려는 나의 행태는 자기바판을 받아 마땅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견딜만하고 내 모든 것을 잃지 않은 상황이라 이미 그 구조 속으로 깊숙히 편입해 들어가 복무하고 있는 다른 선배들에 비해 나은 형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난 여전히 두렵다. 지금은 이렇듯 일정한 '자기검열'이라는 것이 존재하지만 향후 이러한 자기검열마저 무시하면서 전적으로 생활의 전선으로 뛰어들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 말이다. 스승들에게 감사한 것은 감사한 것이고, 역시 섭섭한 것은 섭섭한 것이다. 그러나 공부를 하는 사람으로서 난 내가 견지해 나가야 할 원칙이 있는 것이고 그 용납 가능한 최후의 보루를 포기한다는 것은 나는 '영혼을 파는 행위'라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전혀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다.

 

오늘 이렇게 장문의 글을 쓰는 까닭도 앞으로 이러한 속상함이 심화된다면 내 자신이 모교를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나'를 잃지 않겠다라는 의지 때문이었지만, 결국은 현실의 불만 표출과 지지리 궁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겠다.  

 

   참.. 내 제자들이 이 글을 볼 수도 있겠는데 혹여나 보는 사람이 있다면 못 본척 해주었으면 하는 희망만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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