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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5. 21:00

정거장에서의 충고 /기형도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 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은 귀담아들어선 안된다

주저않즈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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