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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4. 5. 06:40

나는 위선(爲善)적인 사람에 속한다. 위선적으로 보이더라도 그 길이 내가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부단한 반성과 복기의 동기를 제공해 줄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사람을 만나든 처음부터 되도록이면 가식없고 친절하게 사람을 대하는 편이다. 그래서 얼마 되지 않은 인연이라도 당연히 있어야 할 거리를 인위적으로 급격히 좁히는 타입이다. 이것에는 장단점이 있다. 장점으로는 나의 행위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열고 변화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비록 그 확률은 높지 않지만, 이점에 주목하고 살아왔다. 반면, 단점은 '나'라는 사람은 당연히 그런 사람으로 상대방에게 자연스레 인식이 된다는 점이다. 게다가 내가 가진  성격 가운데 고치고 싶었던, 혹은 아직 고치지 못한 나쁜 성질과 성격이 상대에게 보다 더 확대되는 부작용이 있다. 쉽게 말해 백 번 잘해도 잘했던 것은 어느새 기억에서 사라지고, 열 번 잘못했던 직선적이고 싸가지 없는 말만 인상깊게 남는다는 것이다.

 

이런 것에 어느 정도 스스로의 인식은 있었지만, 보통은 상대도 쉽게 나의 외면과 더불어 내면도 봐줄 것이라는 근거없는 희망이 항상 뙤아리를 틀고 있었다. 그러나 근거가 없는 만큼, 어처구니없는 기대이기도 하다. 내가 내 생각과 편견에 사로잡혀 안으로 굽듯, 사람들도 각자의 생각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난 보통의 다른 사람에 비해 쉽게 이해받지 못하고, 대개는 성격에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비춰지기 일쑤다. 물론 그 성격의 문제는 실재하고 실존한다. 그 치명적 결함에 꽤 오랜세월 번민하며 지내왔다. 내가 번민하는 만큼, 사람들은 그만큼 번민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매번 경악하게 된다.

 

가만 돌이켜보면 그건 번민하지 않는 자들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도 없는 문제다. 나처럼 비슷하게 할 것이라는 내 기대감이 더 큰 문제다. 이번에 이런 내 삶의 방식 때문에, 나는 나대로 상처 입었고, 상대는 상대대로 상처를 입는 일이 있었다. 상기한 부작용에 대해 뻔히 알면서도 묵과할 수 없었다. 그는 내가 비정기적으로 던진 말의 비수에 상처받은 나머지 평소의 내 선의는 깡그리 잊었고, 나는 얼마든지 다른 완곡한 방식을 선택할 수 있음에도 내 미성숙한 성정의 발톱을 다시금 드러내고 말았다. 

 

잠시 스스로를 위한 변호를 하자면, 내 편협한 눈에는 그의 열망과 욕심이 기실 공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사적인 수준의 것으로 보였다. 공공성을 지향하는 경우 나는 보통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나 언행을 본다. 지난 일 년간 나는 그의 모습 속에서 言과 行의 일치를 제대로 발견할 수 없었다. 물론 그가 나쁜 사람은 아니다. 지극히 정상적이고, 어느 정도 상식적이기도 하며, 책임감과 근면함이 있다. 처음 책을 내고 싶다고 하면서 그는 평가를 통해 자신이 발전해 나갈 계기를 마련한다는 이유를 댔다. 아울러 책을 통해 자신의 학술적, 사회적 목적을 위한 현실적 기반을 정초했으면 좋겠다는 이유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게 정말 그의 순수한 진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초창기 만난지 얼마 안되어 저녁을 먹고 기숙사로 돌아오던 어느날 저녁, 책을 내는 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을 때 내 평소 생각을 얘기하며, 기왕 한다면 좋은 번역서를 먼저 내면 어떻겠냐는 아낌없는 조언도 했었다. 꽤 시간이 흐른 뒤 서로의 오가는 인연 속에서 알게 된 출판사에서 먼저 제안이 왔다고 했지만, 당초 먼저 논문을 증정한 건 그였다. 얼마든지 논문을 돌릴 수도 있다. 그러나 상식적인 수준에서 한 두 번 만난 사람한테 논문을 주지는 않는다. 공부에 대한 갈구 역시 다양한 방법으로 얼마든지 표출할 수 있다. 나이의 많고적음을 떠나 적어도 내 눈에는 그 행위가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열망과 명예욕으로 가득해 보였다. 참고로 난 그 논문을 한참 후에야 받았다. 처음에는 첫 책을 내는 것이니, 얼마든지 그럴 수 있겠거니 이해하려고 노력도 했고, 완곡한 표현도 했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애정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계약을 했고, 집필에 들어간 지 오래였다. 그의 순수한 진심(?)은 사라지고, 자신의 이름 석자가 박힐 책에만 모든 신경이 경사되어 있었다. 천진하게 책 한 권이 자신의 모든 난관을 돌파해 줄 것이라 믿었던 것일까. 애정은 점차 실망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내 화법은 점차 직선적이고 날카롭게 변해갔다. 실망으로 바뀌니 모든 게 마음에 들리가 없었다. 그가 많이 배우기 위해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며 여기저기 다니는 것 역시 일종의 정치적인 목적달성을 위한 행동으로 보였다. 그래도 한동안 느슨한 관계는 유지됐고, 모든 것이 결국 이번에 폭발하고 말았다. 여기까지가 나만을 위한 변명이다.

 

며칠 전 페북에서 먼저 다른 문제로 댓글이 오갔다. 당초 평소 하던 시시콜콜한 입씨름의 연장이었다. 거기까지 끝났으면 아마 별다른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끼는 동생이라면서 내 잘못을 따지고 드는 사람이 나타났다. 겉으로 괜찮다고 했지만 불편했다. 두 사람의 문제라서 가족도 아닌 다른 사람이 개입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그런 친구를 보니 실망감은 한층 더 커졌다. 내가 많은 사람들의 눈이 있는 곳에서 그를 편들고자 대신했던 대리인과 불필요한 논쟁을 이어나갔던 것은, 그가 내 찌그러져 엉망이 된 애정이나마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첫째였다. 그러나 그것은 굉장히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는 이미 자신의 공간이 침해됐다고 생각한 나머지, 자신의 상처만 고려했다. 그리고 다음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글을 올렸다. 그것은 또 나에게 상처를 줬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며 마침내 서로의 밑바닥을 드러내는 파국을 맞기에 이르렀다. 사건 종료 후, 자신의 페북이 '오염'(아마 나와의 댓글싸움을 지칭함)이 됐다는 표현도 하고, 또 편들어준 사람에게 '감동이고 고마웠어요'라는 표현을 봤는데 그 저열함과 용렬함에 화가 난다.  

 

그래도 짧지만 밀도있는 만남을 가져와서 그런지 여전히 그에게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형, 동생을 떠나 내가 먼저 좀 더 느슨하고 관계의 질에 걸맞게 기대감을 좀 덜 가지고 그를 대했으면 어떨까 하는 후회스러움이 나를 괴롭게 한다. 상대방에 대한 기대감도 무형의 폭력이 될 수 있음을, 그리고 실제로 폭력으로 작용했다는 것도 인정한다. 이 점만큼은 그에게 미안하다. 여튼 애정이 떨어져야 정상인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나도 참 답답하다. 이제는 위악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 그도 아니면 앞으로 이런 반복을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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