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이라는 것은 자유의지와의 연관성을 비롯한 다방면의 철학적인 테제들을 안겨준 바 있지만, 굳이 어려운 단어들을 꺼내지 않아도 인간이라면 누구든 언제나 이 문제에 직면하고는 한다. 오늘은 또 하나의 작은 선택의 기로에서 어떤 패를 잡을 것인가 하는 문제로 같이 공부하는 친구에게 잠시 유선상으로 주절주절 털어놓았던 바가 있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다른 친구와 술을 마시면서도 이런 선택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그 친구나 나는 조언이 필요했던 것일까. 어쩌면 주위 사람들의 조언을 구하는 행위는 한 템포 쉬어가는 형태의 일종의 자기 숨고르기가 아닐까. 저기 저 너머 부유하고 있는 부유물들을 모두 건질 수 없다. 하지만 그 부유물들이 사라지기 전까지 무엇을 고를 것인가란 생각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그것이 조언을 구하는 과정이자 선택을 내리는 과정이기도 하다.
뻔한 얘기지만 선택이 때로는 너무 힘든 순간이 있다. 한 순간의 선택으로 가슴을 쥐어 뜯으며 통곡하는 이도 있고, 반면에 희열에 차 오르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선택의 중요성은 차치하고라도 그 결과의 파장은 예측가능한 범주를 이미 초월하는 것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주말에 별세하신 서강대 장영희 교수의 기사들을 몇 토막 읽었다. 평생 목발에 의지해 살면서도 세 차례에 거친 암과의 투쟁. 결국 장영희 선생은 그 정해진(?) 운명을 거스를 수 없었다. 나보다 스물 두해를 더해야 하는 쉰 일곱해를 살아오면서 그녀는 얼마나 많은 선택을 해야 했을까. 아마도 그녀나 나나 각자가 살아 온 세월만큼 그 선택의 수량의 차는 그리 많이 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다만 그 처한 환경에서 중압감만은 차원이 달랐을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나와 같은 선택의 기로에서도 그녀는 언제나 나보다 더 무거운 길을 걸어가야 했을 것이고, 그런 길의 수없는 반복은 그녀의 자아를 더 없이 단단하게 만들었을테다.
나는 그녀만큼 씩씩하지도, 단단하지도 못하다. 여전히 내 자아는 한 손에 쥐면 순두부처럼 으스러질만큼 연약할 뿐이다. 그럼에도 순두부라고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 그녀가 눈을 감기 전에 완성되었다는 두 번째 에세이집에 나오는 문장으로 끝맺음을 하던 신문기사는 단비가 세차게 내리는 5월 11일 저녁 퇴근길의 나를 더 세차게 뒤흔들었다.
경향신문, 2009년 5월 11일 월요일, 21면 <사람과 사람>中.
결과론적이지만 이 기사로 난 선택이 더 쉬워졌다. 물론 마음 속으로는 이미 결정을 내리고 있었기도 했지만은... 도입 부분에서 선택은 자유의지와 관련이 있다는 초보적인인 철학적 해답을 언급했었는데 이렇게 수정하고 싶다. "우리의 선택이란 것은 본래 '자유의지'보다는 실존으로서의 '희망' 혹은 '갈구'와 더 깊은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