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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에 해당되는 글 1건
2010. 12. 20. 07:32

나는 편의점에 간다. 많게는 하루에 몇번, 적게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나는 편의점에 간다. 그러므로 그 사이, 내겐 반드시 무언가 필요해진다.

(.........)

큐마트에 다니면서 내가 한 가장 큰 착각은 푸른 조끼의 청년과 사적인 말을 하지 않으므로 내 사생활이 전혀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데 있었다. 내가 아는 큐마트는 '어서 오세요'와 '감사합니다'의 세계였다. 그의 관심은 그가 파는 물건에 나의 관심은 내가 사는 물건에 있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큐마트를 오래 다니다보니 나는 뜻밖에 의도하지도 원하지도 않은 내 정보들이 매일매일 그가 들고 있는 바코드 검색기에 찍혀나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컨대 그는 나의 식성을 안다. 대여섯 종류의 생수 중 내가 어떤 물을 가장 좋아하는지, 자주 사가는 요구르트가 딸기맛인지 사과맛인지, 흑미밥과 쌀밥 중 무엇을 더 선호하는지 등을 말이다. 원한다면 그는 내 방의 크기도 추측할 수 있다. 쓰레기봉투를 매번 10리터를 사가는 나는 결코 큰 방에 살고 있을 리 없다. 그는 나의 가족관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새벽마다 와서 햇반을 사가는 여자, 필수품을 스스로 사는 어린 여자, 젓가락은 한개만 가져가는 그 여자는 독신이리라. 그는 나의 고향을 안다. 편의점에 겨울옷을 정리한 택배를 부치러 갔을 때, 그는 수수료를 받으며 내 주소를 확인했다.

(........)

그는 나의 식생활에서 성생활에 이르기까지 모두 '보고'있다. 왜냐하면 편의점이란 모든 걸 파는 곳이기 때문이다. 큐마트는 나의 가장 오랜 단골이 된 덕에, 청년은 내게 한마디의 사적인 대화를 걸지 않고도, 나에 대해 그 어떤 편의점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나도 모르는 나의 습관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

나는 편의점에 간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나는 편의점에 간다. 그사이 그곳에선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큐마트의 푸른 조끼의 청년이 몇번 바뀌었으나 그곳의 남자들은 항상 푸른 조끼를 입고 있으므로 상관없다. 몇번 더 휴대폰을 충전하러 갔으나, 사장들은 충전기를 없애고, 일회용 배터리를 들여놓았다. 몇번의 폭설이, 장마가, 안개가 있었으나 그것은 원래 그런것이므로 상관없다. 이따금 '말'이 듣고 싶을 때 당신은 수다쟁이 사장이 있는 세븐일레븐으로 가라. 비디오방에서 서로를 안았던 어린 연인을 퇴학시킨 선생은 컵라면을 사 먹고, 아이를 지우게 한 남자는 목이 말라 맥주를 사러 왔고, 아직도 아버지께 꾸중 듣는 백수 청년은 오늘도 담배가 떨어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한 이 기록은 마침내 시시해진다.

한번도 휴일이 없었던 그곳에서 나는-나의 필요를 아는 척해주는 그곳에서 나는-그러므로 누구도 만나지 않았고, 누구도 껴안지 않았다. 내가 편의점에 갔던 그사이, 나는 이별을 했고, 찾아갔고, 내가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 거대한 관대가 하도 낯설어 나는 어디를 봐야 할지 몰라 서성이고 있다. 당신이 만약 편의점에 간다면 주위를 잘 살펴라. 당신 옆의 한 여자가 편의점에서 물을 살 때, 그것은 약을 먹기 위함이며, 당신뒤의 남자가 편의점에서 면도날을 살 때, 그것은 손을 긋기 위함이며, 당신 앞의 소년이 휴지를 살 때, 그것은 병든 노모의 밑을 닦기 위함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당신은 이따금 상기해도 좋고 아니래도 좋다. 큐마트, 세븐일레븐, 패밀리마트는 모른다. 편의점의 관심은 내가 아니라 물이다, 휴지다, 면도날이다. 그리하여 나는 편의점에 간다. 많게는 하루에 몇번, 적게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나는 편의점에 간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사이, 내겐 반드시 무언가 필요해진다.

출전: 『달려라 아비』, 창비 2005

문장의 문학집배원에서 가져옴. 동영상으로 낭송과 영상을 다시 보고들을 이는 아래를 클릭.

http://www.munjang.or.kr/mai_multi/djh/content.asp?pKind=05&pID=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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