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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로 끝나는 시'에 해당되는 글 1건
2010. 12. 1. 00:42

1. 외국인민에 대하여


한창 비가 내릴 때는 그렇게 비가 오는 것이 싫더니, 간만에 내린 비는 실로 반가웠다. 아니, 사실은 비가 그친 직후의 청명한 공기가 더 좋다고 해야겠다. 때문에 오늘 상하이의 밤은 명멸하는 중! 정기적으로 외출을 하는 날은 그나마 사고의 폭이 좀 더 넓어지는 기분이다. 게다가 기계적인 논문번역을 하지 않고 모국어로 마음껏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더욱 신나는 일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열망한다. 어학실력이 지금보다는 좀 더 나아지기를...


이곳에 온 나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나는 외국인이지만 외국인이 아니요, 중국에 살지만 중국인이나 상해사람도 아니다. 요컨대 '상하이의 외국(인)인민' 정도로 개괄해 두자. 어느새 그만큼 외국인으로서의 긴장감도 많이 없어졌다는 반증이고(물론 언어의 벽에 부닥칠 때는 여전히 새록새록 내가 외국인임을 각성하게 된다.^^:), 아울러 중국 인민으로서 100%동화될 수 없는 까닭이다.


중국인들의 일상생활에 근접한 생활을 한다 해서 중국인화될 수도 없고, 또 그렇다고 이에 대한 미련은 내팽겨친 상태로 쉐푸루를 전전하고, 여기 생활에 맞지 않는 소비정신을 발휘한다고 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어느 것 하나 칭찬할 만한 것도, 비난할 일도 없다. 결국은 선택과 가치판단의 문제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나는 인민이기를 소망하지만, 인민이 될 수 없음에 일찌감치 좌절했다. 그래서 외국인민이 되기로 하였다. 내가 일컫는 외국인민이란 무엇인가. 내 자신에게는 단어 그 자체로 모든 것이 설명이 가능한 것이지만, 풀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역시나 녹록치 않은 일이다. 그저 훗날 기억의 한편을 꾹 누르게 될 어느 날, 이 곳의 내가, 이 때의 내 자신이 선명하게 출력되어 나오길 바란다. 그리고 활짝 웃고 있기를.


내가 좋아하게 될 진짜 인민들, 또 내가 좋아하게 될 어설픈 다른 외국인민들과의 연대 없이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으리라. 공부를 통해서는 절대 이룰 수 없는 것들에 다가가려는 것이 내가 추구하는 외국인민으로서의 자세이다. 당최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지. 사실은 이보다는 오늘 오가다 읽은 詩 두 편을 같이 읽고 싶은 욕구가 더 컸다. 1타 3피가 될 지 모르겠다.



2. 여, 자로 끝나는 시  

            심보선 ,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 지성사, 2008), pp.86-87.


안녕하세여, 어디가세여, 나 몰라라 도망가지 말아

여, 우리 피시방에서 만났던가여, 아니, 전생이었던

것 같네여, 어떻게 지내셨어여, 전 오늘 좀 슬퍼여,

사실 애인이랑 막 헤어졌어여, 육 개월 동안 밤마다

애무하던 그녀 다리가 의족인 줄 어제서야 알았어여,

뭘여, 제가 나쁜 놈이지여, 저 위 좀 보세여, 저놈의

달은, 누가 자기 자리 뺏어갈까 봐 낮부터 저러고 버

티고 있네여, 참 유치하지여, 한 백 년 만인가여, 기

억나세여, 당신의 아버지를 어머니라고 부르곤 했지

여, 그냥 친근해서여, 전 호부호형 안 해여, 다 어머

라고 해여, 제 삶은 홍길동전과 오이디푸스 신화의

희극적 만남이지여, 도대체 누구냐구여, 몇 생 전이

던가여, 우리 어느 심하게 게으른 나라의 국가대표

산책팀 소속이었자나여, 기억 안 나세여, 왜 저보고

사는 게, 납치할 아이 하나 없는 세상의 유괴범처럼

황당하게 외롭다고 그랬자나여, 불어였던가여, 스페

인어였던가여, 왜, R 발음에 세상의 모든 부조리를

우겨 넣은 듯한 언어로 말했자나여, 그렇지여, 첫번

째 생 다음은 다 후렴구이지여, 그렇지여, 신은 희로

애락을 무한의 버전으로 믹싱하는 DJ지여, 그렇지여,

우리 인간은 그 리듬에 맞춰 춤이나 출 따름이지여,

같이 커피나 한 잔 하실래여, 전 크림 안 넣어여, 하

얀 게 뭉게뭉게 번져가는 걸 보고 있음 괜히 기분 나

빠져여, 뻔한 성적 상상력에 지나친 예민함이라고나

할까여, 누구 기다리세여, 다행이군여, 요새는 뭐 하

시나여, 전 요새 시 다시 쓰고 있어여, 사실은 아무

거나 쓰고, 이거 시다, 그러고 있어여, 엊그저께는

이력서에 사진까지 붙이고, 이거 시다, 이거 이력서

아니다, 그랬지여, 취직은 몇 번의 후생에나 가능하

다 여겨집니다여, 아, 제가 이상한 놈으로 보이나여,

님의 표정이 불편하다는 의사를 살짝 비춰주시네여,

그러세여, 붙잡지 않겠어여, 커피 값은 제가....아,

그래 주면 고맙지여, 안녕히 가세여, 시간 뺏어서 죄

송합니다여, 다음 생에 볼 수 있음 또 보지, 아님 말

지, 여.



3.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도덕적이고 미적인 명상   

                                           심보선, 『위의 책』, pp.34-38.

 

내 육체 속에서는 무언가 가끔씩 덜그럭거리는데

그것은 가끔씩 덜그럭거리는 무언가가 내 육체 속

에 있음을 상기시킨다


욕조 속에 몸 담그고 장모님이 한국에서 보내온 황

지우의 시집을 다 읽었다

시집 속지에는 "모국어를 그리워하고 있을 시인

사위에게"라고 씌어 있었다

(장모님이 나를 꽤나 진지한 태도의 시인으로 오해하

는 것이 사실은 부담스럽다)

문득 무중력 상태에서 시를 읽는 기분이 어떨까,

궁금해져

욕조 물속에 시집을 넣고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그렇게 스무드할 수 없었다

어떤 시구들은 뽀골뽀골 물거품으로 올라와 수면

위에서 지독한 냄새를 터뜨리기도 했다


욕조에서 나와 목욕 가운을 걸치며 나는 생각했다

정말 이 안에 아무것도 안 입어도 되는 것일까?

도덕적으로 그리고 미적으로 그래도 되는 것일까?

그러나

현 자본주의의 존재는 정당화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나는 오랫동안 미루어왔다.

아니, 사실은

그런 질문을 애초에 던지기라도 한 것인가?


머리를 드라이어로 말리고 있는데

사회운동가인 맥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마찬가지로 사회운동가인 애인 레슬리 집에

서 동거 중이다

오늘 밤에 자기네 집에서 식사나 같이 하자는 것이

었다

(그가 나를 한국에서 온 좌파 급진주의자로 오해하는

것이 사실은 부담스럽다)

네 시인데 방 안은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주관적 조건과 객관적 조건이 맞아떨어질 때, 혁명

이 일어나듯이

블라인드의 각도를 태양 빛의 입사각에 정확하게

맞출 때

이 방은 제일 밝다, 그러나 그런 일은

나 같이 게으른 인간에게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대학 다닐 때, 데모 한번 한 적 없는 아내는 의외

로 나의 좌파 친구들과 잘 어울린다

심지어는 오늘 또 다른 사회운동가 아라파트도 오

는 거냐고 묻기까지 했다

(그러고 보니 아내는 지난 대선 때 민중 후보를 찍었다)

지난번 우리 집에서 「위 섈 오버컴」을 다 함께 합

창할 때도

아내는 옆에서 녹차를 따르며 잠자코 웃기만 했다

아내는 그러나 이혼을 의식화시키는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서

그럴듯한 열매 한번 못 맺은 나쁜 품종의 식물, 나

를 가꾸며 삼 년 동안 잘 버텨왔다


문득 고마운 마음이 들어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아내에게 다가가 목욕 가운을 활짝 펼쳐 보이고 싶었

으나

나는 그런 짓이 도덕적으로나 미적으로 용납이 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의자에서 일어나 블라인드의 각도를 고치며 아내

는 투덜거렸다

더 밝은 곳으로 이사 가고 싶어

하지만 집세를 생각해야 할 것 아냐, 그리고 당신,

내가 한 질문에 먼저 대답이나 하란 말이야!

그러나 내가 어떤 질문을 아내에게 한 것인가? 질

문을 과연 하기나 한 것인가?

를 난 기억할 수 없었다, 기억하려 애쓰는 동안

태양 빛이 블라인드의 각도를 심각한 수준 이상으

로 초월하였으므로

방은 속수무책 어두워져갔고 이내 모든 것이 암흑

속에 잠겨버렸다


암흑 속에서 무언가 가끔씩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것은 가끔씩 덜그럭거리는 무언가가 암흑 속에

서 움직이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내가 깨어난 것은 놀랍게도 깜박이는 불이

2→1로 진행 중인 엘리베이터 안이었다

레슬리 집에 와인이라도 한 병 사가야 되는 것 아

니냐, 도대체

무슨 생각에 그리 깊이 빠져 있는 것이냐고 묻는

옆의 아내가 오늘따라 무척 예쁘게 보였다,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목욕 가운 펼쳐지듯 활짝 열려,

또 다른 세계를 통하는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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