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좌표는 없다. (2008/01/30 01:24... at naver)
은희경 소설집,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中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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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별이야말로 인류의 가장 오래된 좌표이니까요. 좌표의 정의에 대해서는 다들 기억하시죠? '직선 위의 한 점 O를 원점으로 한, 임의의 점 P의 위치를 나타내는 수나 수의 쌍.' 수학시간에 배웠잖아요. 즉 'O를 원점으로 한 P의 좌표'말입니다. M은 언제나 좌표를 필요로 하는 타입이니 로키에서는 궁한 나머지 곰을 좌표로 삼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좌표를 과신하지는 마세요. 역사 이래 인류의 자표는 끊임없이 변화해왔으니까요. (중략) 할 수 없네요. M에게 다른 좌표를 찾아줘야 할 것 같아요. 상투적인 말이긴 해도 어쨌든 인생이란 길찾기이니까요. 늘 붙어다니는 친구들이 있다는 건 또다른 친구의 접근을 어렵게 만들죠. 그리고 늘 가는 길로만 간다면 우리의 역사적 사명인 진화는 언제 하냐구요. 오늘 제가 좀 수다스러웠나요? 사실 이제부터는 자주 글을 올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동안 잘 놀았고 돈도 대충 다 썼으니 다시 직장으로 기어들어갈 때가 된 거죠. 그리고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이제 머리가 차가워지는 가을이 되었으니까요. 지겹고 무더운 열대야가 연일 계속되다가 어느 새벽인가 문득 서늘한 바람을 느끼고 이불을 끌어당기는 순간 우리는 갑자기 가을이 왔다는 걸 깨닫게 되죠. 혹시 바로 그 순간 이렇게 중얼거리지는 않았나요? 아, 서른이 올 때처럼 가을도 갑자기 오는구나. 지금까지, 친사회적이고 낙천적인 4번 유형 B였습니다.
은희경, 「지도중독」,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서울: 창비, 2007), PP. 177~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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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에게도 들려주지 않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중략) ----선배는 산에 자주 간다면서요? ----난 야생이 좋아. 뭐가 들어 있든지 알 수 없는 세계거든. 인간이라는 종만으로는 세상이 너무 뻔하잖아. 인간은 적응을 너무 잘 해서 재미가 없어. 적응만 하면 진화를 할 수가 없지.
----반항아가 진화에 유리하다는 건가요?
(중략)
----선배가 생각하는 진화란 게 뭐예요?
----모두들 다른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진화야. 인간들은 다르다는 것에 불안을 느끼고 자기와 다른 인간을 배척하게 돼 있어. 하지만 야생에서는 달라야만 서로 존중을 받지. 거기에서는 다르다는 것이 살아남는 방법이야. 사는 곳도 다르고 먹이도 다르고 천적도 다르고, 서로 다른 존재들만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거야.
----왜 그렇게 지도를 열심히 보세요?
P선배는 피식 웃었다.
----좌표 읽는 것은 내가 풀어본 중에 가장 쉬운 2차방정식이야.
원점 O가 확실하면 P의 위치는 구할 수 있는 법이거든.
----P의 위치가 구해지면 가야 할 방향이 보이겠죠?
----아니.
다음 순간 P선배의 얼굴에서 웃음이 걷혔다. 내 등 너머 어딘가 촛점을 맞추고 있었다.
----올바른 길이란 건 없어. 인간은 그저 찾아다녀야 할 뿐이야. (후략)
은희경, 「지도중독」,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서울: 창비, 2007), PP. 181~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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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를 마치고 사람들이 도시로 돌아왔다. (중략) 학원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지난학기에 가출한 적이 있는 여학생이 나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성적이 안 올라서 고민이니? 그게 아니고요. 여학생은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선생님, 저 오늘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떡볶이 말고 술 사주시면 안돼요? 나는 약간 망설이다가 B의 블로그 주소를 알려주었다. 거기 들어가보면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있을지도 몰라. 내 친구가 올리는 글들이 일종의 지도라고 할 수 있거든. 집에서는 컴퓨터 못해요. 엄마가 인터넷 끊어놨어요. 그럼 엄마한테 술 사달라고 해. 여학생이 얼굴을 찡그렸다.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에요.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혼자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좀 걷고 싶은 날씨였다. 날카롭게 쏘아볼 뿐 여학생도 따라오지는 않았다. 늦은 밤 도시의 거리에는 텅 빈 채로 가을이 시작되고 있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모르겠다고? 서른이 넘었는데, 나도 아직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몰라. 바람이 서늘하고 간간이 별도 보였다.
은희경, 「지도중독」,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서울: 창비, 2007), PP. 182~183.
足 : 아.. 정말 나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여전히 모르겠다. 삼십대의 수확이라면 이제 더 나이가 들어도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계속 모를거란 사실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속적인 좌표설정과 좌표를 찾아 가기 위한 허무한 몸사위를 보일 것이다.